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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May 19. 2020

상처 받고 좌절한 뮤즈가 되어야만 작가가 되는 걸까

그렇게는 살기 싫어

제 글에 병신, 이라는 욕설인 단어가 나와서 읽으시기 전에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병신’이라는 단어는 몹시 좋지 않은 표현이기 때문에 글에서 ‘병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실제상황에서 그 표현을 썼기 때문에 글에 사용한 것도 있지만 글 분위기에 어울리는 더 적절한 다른 표현을 찾지 못해서 그대로 사용한 것이기도 합니다.


국어사전에 ‘병신’의 뜻은

1. 신체의 어느 부분이 온전하지 못한 기형이거나 그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 또는 그런 사람

2. 모자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주로 남을 욕할 때 쓴다.

3. 어느 부분을 갖추지 못한 물건


으로 나옵니다.


저는 2. 의 뜻 중에서도 남을 욕할 때 쓰기 위한 단어로서 선택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까미유 끌로델과 로댕의 연애담은 유명하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연애 및 결혼 생활도 유명하다. 둘 다 사랑의 시작이 가르침을 주고받던 사제의 형태였다.

     

여자가 도달하고 싶은 분야에서 이미 대가가 된 중년의 남자와 이제 막 그 길을 나선 어린 여자의 사랑 이야기.  

    

나는 위로든 아래로든, 나이차가 너무 많은 남자를 만나고 싶지 않다. 어릴 땐 그걸 러프하게 아래위로 서너 살 까지 괜찮다,라고 대답했다. 지금은 확대하긴 했지만 더 명확히 세워둔 편이다.      


내가 1980년대 중반에 태어났다. 내가 만나는 남자 또한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1980년대 생이었으면 좋겠다. 세상엔 많은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있고, 사랑의 정해진 모양은 없고 그 다양한 사랑들을 모두 존중하지만, 내 연인의 가이드라인은 저렇다. 누가 고지식하다고 하든 말든 상관없고, 그 남자가 아주 우월하게 매력적인 외모와 성격과 엄청난 부를 가졌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극단적 비유를 들자면, 내 주변 친구들 중에는 하정우를 이상형으로 꼽는 친구들이나 언니들이 많은데, 나는 하정우가 70년대 생이라서 남자로 보이지 않을 정도다. 훌륭하든 말든 내 가이드라인 바깥의 남자 말고, 내 취향의 80년대 생을 만나고 싶다.      




내 가이드라인을 벗어난 어린 남자가 적극적인 경우는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경험담을 쓸 수 없어 유감이다.


그러나 내 가이드라인을 벗어난 적극적인 나이 많은 남자는 몇 명 있었다.      


사실 흔한 얘기다. 어린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나이 많은 남자들 이야기.


그중에서도 여자들이 대학생 시절에 많이 겪는 일 중에 하나가 있는데 기혼 남성인 교수가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일이다. 나 역시 겪었다.    

  

그들의 접근 방식이 다 비슷할 것 같은데, 타깃의 창작물, 혹은 과제 등을 칭찬하며 그 여자를 점찍는 것이다. 처음에는 정말로 창작물이 괜찮아서 칭찬을 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그런 문장을, 그런 창작물을 만들어낸 네가 특별해서, 그러므로 너를 더 알고 싶다는 이유로, 그 여자와의 연애, 혹은 성관계를 희망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매뉴얼이나 비공식적인  학원이 있는 걸까. 학원이 있다면 우리나 교육시스템은 그런 학원에서조차 주입식인 걸까.


그들의 시작은 항상 천편일률적이다. 그들은 그걸 클래식, 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 교수도 수업시간에 내가 쓴 작품을 칭찬하며 내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재능을 가진 것처럼 말했다. 물론 내 나름 잘 쓴 작품이었긴 했고 어떤 가능성이 보였을 수는 있지만 ‘누가 봐도 엄청난 재능의 글, 혹은 당장 공모전에 당선돼서 그 분야에서 밥벌이하고 일을 할 수 있는 수준의 글’은 아니었다.


그 후에 교수는 취업상담의 형태로 나를 불러서, 어떤 스타일의 글을 쓰고 싶은지, 좋아하는 작가는 누군지, 하고 싶은 일은 정확히 어떤 방향인지 물어봤다. 내 대답을 듣더니, 역시 넌 좀 다른 것 같았다고 하며 자신의 지인이 출판사를 운영하는데 연계 취업을 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봐주기도 했다. 낙하산으로 들어가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그 출판사와 출간된 책을 검색해 봤는데 출판사의 규모와 출간된 책들이 후져서 거절했다. 무작정 '출판사'라고 좋다고 들어갔다가는 월급 밀릴 정도로 영세한 규모였다. 출간된 책들도 별로였다.

           

그 분야의 권위자거나 관련 업종으로 밥벌이하는 남자들은 작가로 데뷔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사람을 알아보는 촉을 가진 게 틀림없다. 나 스스로도 아직 작가가 될 정도의 글이 아닐 수도 있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하게 작가가 되고 싶긴 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이 예전에 겪은 성장통을 현재 겪는 중인 젊은이들을 알아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촉은 젊거나 어린 남성들에게 향하지 않고 젊거나 어린 여성들에게만 향한다. 그리고 나는 그 교수가 간절하게 작가로 데뷔하고 싶은 나의 마음을 알아챈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나의 환심, 혹은 관심을 사서, 흔한 말로 어떻게 해보려는 것이라는 촉이 왔다. 훗날 사랑이라고 포장을 할지 안 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성의 과도한 친절에는 불순한 목적이 있다고 의심하는 타입이었다. 당연히 그의 칭찬도 친절의 범주에 속했고 나는 그의 친절이 의심스러웠다. 간절하게 데뷔하고 싶은 어린 여자인 것까지는 틀림없었으나 그것 때문에 누군가의 칭찬과 친절에 굶주려, 달콤한 말 몇 마디에 속아서 감동받고 고마워할 순진한 어린양은 아니었던 셈이다.


아무튼 미래지향적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자면, 그런 식의 데뷔를 한다고 해도 독자, 혹은 관객들이 원하는 글이 아니라면 무의미하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봤을 때 그 모든 시작이 될 데뷔, 그걸 시켜줄 만한 능력이 있는 인간도 아닐 것 같았다.


불쾌한 건 불쾌한 거고, 혹시나 몰라서 '내 재능을 알아본 뛰어난 안목'을 운운하는 그가 실제로 누굴 작가 데뷔시켜줄 수 있는 정도의 권위는 정말 있어서 어떤 뜬구름을 보여주는 건가 싶어 검색하고 조사해보니 학생들한테나 대단하지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기혼자 남성 놈이 어린 여자에게 이런저런, 그 여자가 관심 가질 만한 이야깃거리를 많이 알고는 있었으나, 그 이야깃거리 중에 정말 도움이 되는 정보나 제안은 없었다. 비록 재능이 있다는 달콤한 말은 자주 하긴 했지만, 그건 그쪽에서 말 안 해줘도 아는 것이었다.      


그리고 달콤한 말의 내용들을 분석해 보면 결국 예술가가 되고 싶어 하는 어린 여자가 원하는 성취나, 목표와는 전혀 무관하고 영양가도 하나도 없었다. 듣기 좋다. 그게 끝이었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서로가 해준 말을 분석하는 게 별로일 수도 있지만, 안 사랑하는데 분석 안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나는 열심히 치열하게 분석했다. 그러자 영양가 없음의 적나라함이 너무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많은 문학작품과 예술가들의 역사를 통해 이런 관계의 끝을 알고 있었다.


사랑이라고 포장하고 시작해서, 끝까지 사랑이라고 포장을 해 줄지, 나중에 가서는 확실하게 떼 버리기 위해 미안한데 그때 당시의 일시적 성욕이었다고 인정할지 모르지만 책임질 생각은 없이 젊은 여자의 몸을 탐닉하고 싶고, 그 탐닉하는 동안의 감각과 쾌락을 충분하고 강렬하게 느끼고 싶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 역시 젊어진, 혹은 회춘하는 기분을 맛보고, 그걸 또 자신의 예술적 영감의 토대로 삼아 뛰어난 창작품을 만들려고 그러는 것일 뿐이라는 걸 말이다.


가장 잘 된 예가 로댕이다. 로댕은 까미유에게 뮤즈라고 치켜세워줬지만, 결국 자신의 가정으로 매번 돌아갔으며 그녀가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에게 말해준 그녀의 조각품 아이디어를 가로채기도 했다. 그녀가 그 일로 광분하면 그녀를 정신이 아픈 사람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말하고, 그녀의 상처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미유는 이 비열한 로댕을 사랑이라는 이유로 죽을 때까지 놓지 못했고, 뿌리치지도 못했고, 그런 그와의 결혼을 꿈꾸며 그의 아이를 네 번 가졌고 모두 유산했다. 기록에 의한 것만 그렇고 그 이상의 유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게 뮤즈의 역사다.


모든 뮤즈의 끝이 이렇지는 않겠지만 기혼 남성과 어린 연인 사이에서의 뮤즈는 이런 경로를 밟는 게 대체적이었다. 덜 파괴적이나 더 파괴적이냐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만나는 동안 그 기혼 남성들이 어린 연인 앞에서 나의 뮤즈라며 황홀해하고, 둘도 없이 운명인 듯 대하지만, 내가 보기엔 막판엔 어차피 선택 안 하고 버릴 거긴 한데, 그녀들에게 원망받기는 싫어서 붙여주는 듣기 좋은 칭호 같은 느낌이다. 쓰레기 취급받기 싫어서 그런 이유도 좀 있는 것 같고. 나는 그딴 뮤즈 칭호 따위에 관심이 없다.      


삶의 권태를 느끼는 중년의 기혼 남성 교수(혹은 대가)와 20대의 이제 막 시작하려는 예술가 지망생 여자애의 만남의 끝은 결국 남자는 자기 가정으로 돌아가면서 끝이 난다. 간혹 나중에 인터뷰나 회고록 등을 통해 사실 그녀가 나의 유일한 뮤즈라고, 사랑이었노라 고백하기도 한다. 뮤즈 당사자에게는 아무 영양가도 없는 그런 고백 말이다. 그런 뮤즈가 여러 명이었던 예술가 놈도 있다.




어쨌든 뮤즈인 여자가 그 상실의 고통으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건 이제 역사적으로도 흔한 클리셰였다.


<나는 왜 거짓말을 하는가>라는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소설로 쓴 작가는 19살이라고 속였지만 실제로는 17살에, 중년의 작가와 사랑에 빠졌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결국 자신을 떼 버리려는 그 기혼 남성의 집으로 거의 매일 밤늦게 전화를 걸었다가 그의 딸과 통화를 하게 된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 말 없이 있는 그녀에게 그의 딸은 당신이 누군지 안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고 만다. 누군데? 그러자 그의 딸이 말한다. 우리 아빠를 홀린 재수 없는 여우.


물론, 그녀들의 고통이 승화해서 문학작품으로 남은 것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비슷한 구조의 연애담이 얼마나 흔한지, 그 끝이 얼마나 지리멸렬하게 똑같은지, 안 살아봤지만, 그런 경우를 너무 많이 봐서 살아본 느낌이다.     


나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확실히 뭔가 남는 게 있는 노력을 선호한다.      




어쩌면, 잦은 연락 및 자질구레하고 하찮은 도움을 주려는 노력에서 끝났다면, 그땐 잠시 찜찜했더라도  그냥 그 교수의 관심이 내 과대망상인 걸로 끝났을 것이고, 내가 그를 딱히 기억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인상적인 점은, 참 가상하고 짜증 나게도, 할 수 있는 데까지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창의력은 없을까. 식상하게.


25번째 내 생일이었다. 나는 대학 친구들과 오랜만에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2차 째인지, 3차 째인지 또 술을 마시러 가는 중이었다. 자리를 옮기기 위해 일단 거리로 나왔을 때 그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거의 12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학기도 끝났고 학점 나오는 것도 다 끝났기 때문에 이 늦은 시간에 왜 전화했나 싶긴 했지만, 교수님 전화이니 일단 받았다. 누가 먼저 여보세요, 혹은 네, 등으로 자신의 취한 상태를 먼저 드러냈는지 모르겠으나 누가 됐든 아마 바로 취한 상태가 드러나는 목소리였을 것이다. 나도 취해 있었고, 교수의 목소리도 평소와 다른 텐션이었다. 내 안부를 물으며 늦은 시간에 연락한 거 아닌지 걱정했다, 이 시간까지 안 자느냐 묻는 교수에게 오늘 생일이라 친구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마시라고 무슨 일이냐고 했다.      


그러자 자신도 ‘때마침’ 술을 마시고 있었다며, 자신이 있는 곳으로 넘어오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일행이 4명인가 5명인가 있었다. 다 데리고 넘어가야 하나? 하는 생각과 어디쯤인데 오라는 거지?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다가, 생각해보니 지금 재미있게 마시고 있었는데 교수님과 술자리를 한다면, 우리가 마신 술값을 내준다 쳐도 우리끼리 편하게 즐기면서 마시는 것보다는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차라리, 우리가 갔을 때, 인사받으신 다음, 우리끼리 마시라고, 하지만 적당히 마시라고 카드나 용돈 좀 주고 가 주시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하시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끼리 많이 마셔봤자 이제 배불러서 10만 원 안짝으로 마실 테지만 그래도 먼저 요구했다가 버르장머리 없고, 경우 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벌써 이렇게 계산기 두드리는 것 자체로 기분이 잡쳐지고 있어서, 그냥 마음 편하게 우리 돈으로 우리끼리 먹는 게 낫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런 내 생각의 회로를 논리 정연하게 설명할 상태는 아니었다. 술을 마신 상태였으므로. 친구들이 함께 있는 상태고 친구들 수가 많으니 실례인 것 같다고 에둘러서 말했다.      


그럼 너 혼자 넘어와,라고 했다. 그리고 그 교수는, 갑자기 그 상황에서, 내가 굳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쓰는 글은 좀 특별한 것 같다고, 문장이나, 이야기 흐름이나 남들과 다른 뭔가가 있다고, 아직 네가 작가가 되진 않았지만, 널 발견한 내가 어떤 기분일지 넌 모를 거라고도 했다.


콜럼버스냐, 발견하긴 뭘 발견해. 교수님 쪽에서 발견하기 전부터 난 원래 글을 쓰고 있었고 발견 안 해줬어도 내 글을 계속 쓸 생각이었는데 무슨 상관이실까, 하는 반항심 혹은 같잖음이 들었다. 재능에 대한 칭찬이 실질적으로 보장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선 그 칭찬이 반갑지 않았다. 그 교수가 반복해서 말하는 그 특별하다고 해주는 재능은, 운 없으면 얼마든지 작가가 안 될 수 있는, 하지만 또 운과 타이밍이 도와줘서 능력 좋은 기획자에게 발견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도 있는, 없다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특별하다고까지 말하기는 힘든 정도의 재능, 나도 알고 있는 바로 그 재능이었다. ‘아주 소름끼치는 재능은 아니지만 어떤 가능성이 보이는 은 분명한 정도의 재능말이다. 아시다시피 모든 가능성은 원래 실낱 같다. 나는 그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다양한 방식과 세련된 표현으로 작가 지망생인 여자애들이 혹할 만한, 그 나이 또래 여자들이 간절히 바라는 ‘사회적 인정 욕구’를 채워주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난 인정 욕구고 뭐고 뜬구름 잡는 소리 제일 싫어한다. 반복해서 말한다고 그 재능이 갑자기 아주 탁월해지거나, 작가 데뷔가 당장 이뤄지는 것도 아닌데 계속 듣자니 짜증 났다. 친구들은 옆에서, 춥다고 어디 갈지 빨리 정하라고 다그치고 있었다. 짜증은 났지만 전화를 끊을 타이밍을 찾을 수 없어 글에 대한 칭찬을 좀 더 듣고 있었는데, 글 얘기하다가 갑자기 '내가 너를 아끼는 거 알지?' 하는데 소름이 끼쳤다. 예술적 완성도에 대해 자세하게 얘기해주고 싶으니 이쪽으로 오라고, 술을 사주겠다고 오라고 한 장소가 호텔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오해하지 말라며, 자신도 친구와 함께 있다고 말했다.


과연 오해일까. 갈 생각도 없었지만 막상 가면, 있지도 않았던 그 가상의 친구, 가버렸다고 할 것 같은데.      


계속 넘어오라, 는 말도 기분 나빴다. 내 생일인데, 내가 주인공인데, 누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기분 나빴다. 지금 당장 예술적 완성도에 대해 몇 마디 듣는다고 공모전 당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리고 그가 내 글을 예술적으로 느낀 것도 기분 나빴다. 나는 항상 내 작품이 예술적이기보다 상품성 있는 글이길 바랐다. 그리고 그렇게 해 주고 싶은 얘기가 있고 술을 사주고 싶으면 지가 넘어와서 술을 사 주든가. 난 예술적 완성도에 대한 충고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교수와 학생이라는 계급장 떼면 나는 20대 한창 꽃다운 나이고 그쪽은 그저 늙은 남자밖에 안 되는 주제에 학교 밖에서도 교수 행세를 하며 누구보고 오라가라야 교수가 학교 밖에서도 무슨 벼슬인가, 지금 니 나이보다 10살 어려도 안 만날 텐데 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아, 씨,라고 했는지, 아니면 병신, 이라고 했는지, 뭐가 됐든 학생이 교수에게 하든, 교수가 학생에게 하든 부적절한 그 단어를 똑똑하게 들릴 정도로 말하고 말았다. 하필 그 순간 주변이 일시적으로 조용해졌고 그래서 똑똑하게 잘 들렸을 것이다.      


교수가, 야, 너, 뭐라고 했어?라고 되물었다. 나는 내 생일에 인생 및 취업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이런 영양가 없고 같잖은 전화를 받았다는 게, 그것도 오래 들어주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제대로 잡쳤다. 나는 대꾸했다. 제대로 들으신 거 같은데 또 말씀드려도 기분 나쁘지 않을 자신 있으세요?


조용했던 주변이 또다시 갑자기 시끌벅적해졌고 친구들도 계속 야, 어디 갈지 빨리 정해,라고 재촉해서 교수가 뭐라고 더 말을 하는 것 같긴 했지만 먼저 전화를 끊었다. 술자리를 옮기고 다시 연락이 오지는 않을까 걱정되었으나 다행히 다시 연락이나 문자가 오지는 않았다. 나는 이미 취했지만 더 취하고 싶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나만큼이나 불안했던 친구들 역시 현실을 일시적으로나마 외면하기 위해 열심히 필사적으로 술을 마셨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걱정이 되었다. 사실 술을 마시면서도 속으로 걱정은 되었다. 그 걱정을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즐겁기 위해, 더 열심히 마신 것도 있지만 어쨌든 걱정은 하고 있었다. 아, 씨, 가 됐든 병신이 됐든 교수에게 욕을 한 것은 사실이니까. 내 기준엔, 적절한 순간에 튀어나온 '싹수없지만 적절한' 단어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꼬투리 잡아서 내 학점을 낮게 줄 수도 있는 위치의 사람이었다. 그 교수는 내 학점을 좋게 준, 몇 안 되는 교수였다.      


전화해서 어떻게 학생이 교수한테 욕을 하느냐 꾸중하고 니 학점은 없던 것이라고 나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교수님이 그 시간에 별 중요한 용무도 없이 연락해서는 나를 아끼네 마네, 술을 마시러 오라고 한 장소가 (진짜 순수하게 호텔 바 같은 모던한 분위기였다 쳐도, 물론 나는 그가 그럴 리 없다고 1000% 생각하지만) 호텔이었다는 걸 학교에 다 까발릴 거라고 해야겠다, 정도의 생각을 했고, 흥분하면 말을 두서없게 할 수 있으니 좀 논리 정연하고 침착하게 말할 수 있도록 언급할 내용의 순서를 나름대로 정리해서 준비해두고 있었다. 물론 머릿속으로 한 게 아니라, 글로 밥 벌어먹고 싶은 사람답게 글로 써서 준비했다. 당황하면 머릿속보다는 눈앞의 글자가 더 믿음직스러우므로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서 기계처럼 읊을 생각이었다.


첫 번째 전화는 할 말을 퇴고하다가 못 받았다. 2번짼가, 3번째 연락이 왔을 때 받자,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것도 아주 젠틀하고 말끔한 목소리와 말투로.      


-내가 어제 밤늦게 연락한 것 같던데, 너한테 뭐 실수한 건 없었니?


나도 매우 공손하게 말했다.

아무 일 없었고 별말씀도 없으셨다, 다만 제가 술 마신 상태여서 교수님께 소리를 쳤던 것 같기도 한데 저도 사실 자세히 기억이 잘 안 난다, 죄송하다, 고.


-그랬구나, 어제 나도 뭐 실수한 거 있으면 너도 신경 쓰지 마, 술 먹고 실수한 것 같으니까.     


이번엔 전화가 확실하게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 중얼거렸다. 병신.


술 먹고 억지로 자고 나서도 저렇게 말했을 것 같다. 그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가질 정도로 공부를 한 두뇌를 가졌으면서, 그 술을 자기 손으로 자기 입에 넣었다는 사실을 모르나? 맨날 술이 문제라고 하는 높은 지위의 머리 좋은 인간들이 너무 싫다. 낮은 지위라고 덜 싫은 것도 아니지만.


홧김에 그런 생각도 잠시 했다.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싶으면 이혼하고 당당히 연애하시라고 충고해줄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 교수가 진짜 이혼하고 나보고 만나줄 거냐고 물으면 또 그건 아니었다. 내가 왜 그런 연애를 하냐. 내 또래 훈훈한 애들도 시간이 아까워서 안 만나고 있었다. 졸업하면 남이다. 씨알도 안 먹힐 쓸데없는 충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작가, 혹은 예술가라는 권위를 획득한 중년의 기혼 남자, 그리고 그 남자가 속한 세계에 들어가고자 험난한 예술가의 길을 나선 어린 여자의 로맨스인지 나발인지는 많은 문학작품과 예술작품에서 발견되지만 그걸 내 인생에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 역시 역사적인 여류 예술가들처럼 그런 금기의 사랑을 했다면 나도 내 연애를 합리화하기 위해 남들이 뭐라 부르건 사랑이었다고 묘사할 인간이었을 수도 있고, 흔히 ‘작가의 젊은 시절의 경험담이 녹아 있는’이라는 식의 소개글이 덧붙여진 소설, 혹은 시나리오를 썼을지도 모르지만, 작가 되겠다고 내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게 하기는 싫었다.


그런 식으로 상처 받고, 버림받고, 그래서 그걸 작품으로 승화시켜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게 예술가의 길이라면 선택하지 않는 게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에 상처 받은 청승맞고 아름다운 여류 예술가, 혹은 뮤즈가 되는 삶보다 지금 평범하게 회사 다니고 내 삶이 훨씬 만족스럽다고 하면, 작가가 되는데 실패했지만 실패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내 정신 승리일까.      


예술가는 좀 감정적이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았기 때문에 작가가 되지 못하고 그저 회사원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처 받고 버림받고, 그래서 그 사랑의 고통 덕분에 작가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사랑을 소재로 작품이 된 경우도, 심지어 훌륭한 작품이 된 경우도 물론 많다. 하지만 그런 사랑을 작품으로 승화시키지 않더라도, 찾아보면 예술이나 문학의 소재는 많고 많다.


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겠지만, 다행히 내 학점을 건드리진 않았다. 그 정도로 치사한 인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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