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중엔 왜 쓰레기가 많을까

기다림의 악몽을 맛보았다

by 시은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얘기한다.

“네가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이건, 어린 왕자가 시간 약속을 지킨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질 수 있는 행복이다.




모든 직업군에 이기적인 사람이 존재하겠지만, 예술가 중에 특히 이기적인 남자가 많은 것 같다.


오래전, 좋아하는 남자와 토요일 저녁 일곱 시에 만나기로 한 적이 있었다. 음악 쪽 일을 하는 남자였는데 그 전날, 녹음이 다섯 시쯤 끝날 것 같다고, 일곱 시에 만나는 게 어떠냐고 했다. 나도 좋다고 했다.


나는 낮 열두 시부터 설렌 마음으로 그를 만날 준비를 했다. 옷을 고르고 어떤 화장을 할지 고민하는 그런 거 말이다. 열두 시부터 행복했던 나는, 여섯 시부터 불행해졌다.


아침부터 연락하면 너무 좋아하는 티 날까 봐 참고 참다가 세 시쯤 안부를 물었던 것 같다. 연락이 없었다. 여섯 시, 그에게 오고 있냐고 물었다. 여섯 시 반쯤 어디냐고 물었다. 일곱 시 오 분 전, 만날 수 있는 거냐고 물었다. 여덟 시, 아홉 시, 열 시, 열한 시가 넘은 시각. 이제야 일이 끝났다고 했다. 그 사이, 그는 단 한 차례의 연락도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7시에 연락을 했을 때, 이따 연락할게, 하고 끊더니 열한 시가 넘어서 그날의 첫 연락이 온 것이다.


지금 마쳤는데 너무 보고 싶다, 고 집으로 가면 안 되냐고 했다. 미친 새끼.




그를 알게 된 건 몇 달 전 혼자 떠난 여행에서였다. 여기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뭐냐고 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다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거라고 했고, 나는 혼자 여름휴가 왔다고 했다. 그날 밤, 술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즈음, 나는 회사 일과 시나리오 작업을 병행하기가 힘들어, 시나리오 작가의 꿈을 포기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는 음악 관련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원래는 올해쯤 대학 졸업을 해야 했는데, 우연히 기회가 닿아 꿈이었던 음악 일을 몇 년째 하고 있다고 했다. 이 일을 하느라 대학엔 못 돌아가겠지만 크게 상관없다고 했다. 멋있어 보였다. 한여름 밤, 소주가 달았다.


다음 날, 서울 가면 연락하자며 연락처를 주고받긴 했지만 사실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몇 달 뒤 언제부턴가 그가 계속 생각나고, 그를 알고 싶고, 그의 세계가 궁금하고, 무엇보다 보고 싶고 그랬다. 그래서 요즘 뭐하냐고 연락을 하게 됐다. 이 연락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그와 발전하고 싶은 마음인 건 맞지만, 그가 아니라고 하면 마음 접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연락에 먼저 ‘만나자’고 한 건 그였고, 토요일 저녁 일곱 시라는 약속시간도 그가 정한 것이었다. 요즘 바쁘면 다음에 만나도 된다고 했는데 일곱 시에 만나자고 한 사람이, 스무 시간 넘게 연락 한 통 없다가,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보자고 하면 아이고, 그래도 만나고 싶어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 줄 알았던 걸까. 밤 열한 시가 넘는 시각에 집 근처도 아니고 집으로 오겠다는 건 의도가 너무 뻔하지 않은가.




모두들 꿈보다, 매달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쟁이의 삶을 선택하고 있고, 나 역시 이제 오랫동안 꿈꿔왔던 작가의 꿈을 포기하려고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지못해 하는 게 아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음악 얘기만 하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고, 그러느라 정신없이 사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었다. 마치 <밀회>의 유아인 같았다.


다만 음악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대단한 음악가 거나, 그 분야에서 잘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음악 레슨, 음악회 사회, 연주회 음향 담당, 스튜디오 녹음, 소규모 음악회의 연주 등 소속되어 있는 음악집단의 온갖 일을 하며 밥벌이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마저도 멋있었다.


그런 사람이니만큼, 지금 하는 ‘음악 일’이 중요해서 누굴 만날 상황이 아니라고 하면 연락 그만하려고 했다. 음악이 전부라면, 그게 나한테 미안할 일은 아니다. 누굴 만날 상황이 아니라면 그렇다고 말해달라고, 더 이상 연락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는 절대 아니라고 했다. 그도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아주 밤늦은 시간에, 지금 생각하면 불순한 의도가 보이는, 그때 당시로는 설레는 연락을 하기도 했다.


음악 하는 인간이어서 그런지, 원래 달콤한 말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인 건지, 거짓말이라는 게 눈에 보이는데도, 넘어가고 싶을 정도로, 설레고 낭만적이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와이파이 비밀번호 물어볼 때부터 수작 거는 건 줄 알고 있었다. 거기 와이파이 비밀번호 없었으니까.


사귀기 전이라고 해도, 남자와 여자가 밤에 만나서 뜨겁고 좋은 시간을 가지는 거,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나서 밥을 먹든, 출근해서 일을 하든, 밤늦게 좋은 시간을 보내든, 시간 약속은 인간관계의 기본이다. 내가 연락한 시점부터 재어도, 8시간이다. 직장인의 하루 노동시간인 8시간이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데 썼다는 게, 아무한테도 보상받을 수 없는 내 청춘의 8시간을 날려버렸다는 게 억울했다. 시간뿐만 아니라, 그를 만날 거라고 설레어했던 내 마음도 아까웠고, 화장하고 치장하고 준비한 소소한 노력까지 하나하나 다 아까웠다. 당연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사실, 이 상황이 처음이 아니었다. 두어 달쯤 전에도 내가 먼저 연락을 했고, 그가 보자고 한 적이 있었다. 그가 일 끝나고 7시쯤 보자고 해놓고, 갑자기 8시로 약속을 미루었는데, 8시쯤에 다시 9시쯤 보자는 연락이 왔길래 그렇게 바쁘면 다음에 보자고 하고 이후 연락을 하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그땐 그날, 바쁜가 보다 했다. 내가 틀렸다. 그때 바로 나에게 호감이 없구나, 생각했어야 했다. 그도 나를 좋아했다면, 그 이후엔 그가 먼저 연락을 했을 텐데,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런데 멍청하게도 그땐 바빴지만 요즘엔 좀 괜찮으려나 하고 내가 또 연락을 한 게 문제였다. 여행지의 완벽한 하룻밤으로 만족해야 했다. 시간의 흐름조차 사라지고,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던 밤이었는데.




아무 사이 아닌 그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가 뭘 잘못했는지, 그가 보낸 카톡을 캡처해서 그가 한 말들에 빨간 줄을 그어 다시 보내주며, 학습지 선생님처럼 잘못한 포인트를 하나하나 집어주며, 호감이 없으면 확실하게 선을 그어주던가, 너는 이런 것까지 누가 말해줘야 아느냐고, 그리고 사귀는 사이 아니어도,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 기본은 시간 약속인 거 모르냐고, 도대체 지금 하는 일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어쨌든 이 시간에 만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하고 피곤하니 자야겠다고 했다. 그는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말을 잘못한 것 같다며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그냥 집 근처에서 잠깐만 보자고 했다. ‘집’에서 ‘집 근처’로 말이 바뀌긴 했지만 그의 목적은 동일해 보였다.


그는 얼굴 보고 얘기하자,라고 말했지만 내 눈에는 계속 그의 목적이 얼굴 보고 하자,라고 읽혀서, 됐다고 했다. 의도가 불순해서가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불순한 마음, 나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충족시켜 주고 싶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면, 그의 눈웃음 한 번이면, 내 마음이 풀릴 것 같기도 했다. 당연히 그도 그걸 알고 계속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했었을 것이다.


짜증이 가라앉지 않자 그의 음악 인생을 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연주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 망치고 하고 말 것도 없는 정도의 음악이었다. 15년 넘게 했다는데, 음악 자체는 솔직히 그저 그랬다. 그리고 원래 좋아하는 만큼 미워하는 건데 아무 사이도 아닌 그의 인생이 망하길 바랄 정도로 좋아한 건가 싶어서 그것도 짜증 났다. 짜증이 쌍으로 나서, 잠이 오지 않아 속으로 고자나 되라, 고 욕을 했다.





멍청도 병인 걸까. 나는 저 날 이후, 몇 주 뒤 또 내가 먼저 연락을 했고, 이번에도, 그는 자기가 잡은 약속 시간을 뒤로 미루는, 그리고 이번에는 미룬 시간에 아예 연락이 안 되는, 저 처절한 경험을 결합해서 하게 해 주었다. 인터넷 명언 중에 지인지조, 지 인생 지가 조진다는 말이 있는데 그게 나 같은 멍청이들 때문에 만들어진 말인가 보다. 나는 3번이나 동일한 방식으로 약속을 깨는 남자와 발전적인 인간관계를 드디어 맺고 싶지 않아졌고, 몇 달 동안 이어진 내 멍청함에 종지부를 찍어 주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 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두 사람이 오지 않는 고도를 50년 넘게 기다리는 이야기다. 고도랑 저 두 사람은 약속을 정한 것일까. 시간 약속을 안 정했던 거면 기다리지 말지. 정해진 시간이 있는데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짜증 나는 일이다. 8시간 기다리는 것도 짜증 나는데 노벨상이고 뭐고 50년 동안 누군가를 기다리는 스토리라인의 책을 읽으면, 그 아무리 대단한 주제라고 해도 짜증이 날 것 같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읽을 거다.


사실, 인터넷 검색해보니까 오지 않는 ‘고도’의 의미는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는 희망, 이라고 한다. 냉정히 말하면 희망이 아니라, 희망고문이 더 맞는 말 아닌가? 왜 희망이라고 포장해주는 거지? 개인적 생각으로 문학계의 실드인 것 같다.

나한테 새삼 미안하다. 내가 멍청해서 나한테 이런 마음고생시켰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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