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속, 개기는 연애를 보면서
드라마 1화에는 은희(한예리)가 9년 만난 남자 친구 종민이 3년 동안 바람을 피웠다는 걸 알게 된 후, 그가 살고 있는 집에 찾아가는 내용이 나온다. 종민에게도 화가 났지만 자신과 종민이 연인인 걸 알면서도 그가 바람피운다는 사실을 전혀 말해주지 않은 같이 사는 친구 찬혁에게 더욱 분노해서 따진다.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몰라서 말 안 했어? 너는 그냥 귀찮았던 거야. 남한테 관심 없고 너는 원래 그냥 무책임한 놈이야!
그러자 찬혁이 말한다.
-지가 때 되면 다 말하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냐고! 야,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하자. 오래된 연인 사이라는 게 무슨 법적으로 기득권 같은 게 보장되고 막 그래? 우선권 같은 게 있는 거야? 너 싫증 나서 다른 여자 만나겠다는데, 내가 너한테 뭐라고 하냐?
영상에서는 언니인 은주(추자현)의 팩폭이 먼저 나오고 4:00 대에 해당 장면을 볼 수 있다.
여하튼, 계속해서 찬혁이 뼈 때리는 공격이 이어진다.
-니들 둘이 이미 끝났어! 내가 다 지긋지긋하다. 9년? 막 남들이 놀래니까 대단한 사랑인 줄 알았어? 어? 니들 둘 다 비겁하고 둘 다 그냥! 그냥! 개기면서 보낸 세월이 5년도 넘었어.
은희(한예리)는 그렇게 언니와 연락을 끊었고, 찬혁(김지석)이와도 연락을 끊는다.
찬혁의 대사 중에 이 말이 가슴에 꽂혔다. 오래된 연인 사이. 그리고 그냥 그냥 개기면서 보낸 세월.
뭐랄까, 난 길게 한 연애는 없었지만 남들보다 연애에 안일했던 것 같다. 20대 초중반 때만 해도, 별 일 없으면 29, 30세쯤에 당연히 결혼하고 32, 33세쯤엔 아이도 하나 낳고 그럴 줄 알았다. 나는 20대 후반에 꿈 때문에 그 경로에서 이탈하긴 했지만, 어쨌든 연애하면 결혼하고 그렇게 평온하게 나이 드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했지, 지금 서술한 저 인생이 막 엄청난 노력을 갈아 넣어야 이룰 수 있는 삶이란 걸 전혀 몰랐다.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삶이겠거니 해서 누굴 진지하게 만나보지도 않은 채 20대 후반이 되어 있었다. 28세에 사귄 남자 친구는 썸을 두어달 타다 사귀었다. 그리고 사귀기로 한 지 일주일 조금 넘었을 때, 이 남자는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헤어지자고 말했지만 아직 니가 날 잘 모른다는 그의 해명도 있고, 회사일도 바쁘다 보니, 이 남자는 아니다 싶으면서도 단호하게 헤어지지 못했다. 썸 때의 다정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억지로 내가 알아서 기분 풀어가며, 그래도 가끔 좋을 때가 아주 없진 않아서 저 표현 그대로 '그냥 그냥 개기면서' 5개월을 더 만났다.
그 당시의 내 연애를 정확히 표현할 말을 못 찾았는데 이 드라마 덕분에 찾았다. 나는 연애를 ‘개긴’ 거였다. 이 연애에서 그의 문제는 이제 내가 지적할 필요가 없으니 쓰지 않겠다. 그가 알아서 깨달아서 좋은 연애를 하면 뭐 다행일 거고, 아니라고 해도 내 알 바는 아니니까.
일단 내 문제점 중에 첫 번째는 나는 애써 누굴 만날 노력을 하기 귀찮았던 것 같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난 연애에 좀 안일한 편이었다. 헤어지면 또 다른 누굴 만나야 할 텐데 그런 노력을 하기 귀찮았다. 그냥 주변에 있는 사람이 인연일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막연히 믿었고 1-2년 만나다가 별 문제없으면 그동안 모아둔 돈 가지고 대충 30세쯤엔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서른을 넘기기 전에 웨딩드레스 입는 게 제일 예쁘다는 말을 본 이유도 있었다. 인터넷에서 본 저 쓸데없는 말을 내가 도대체 왜 신경 썼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서른 전에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어느 정도 있었다. '제일 예쁠 때 웨딩드레스 입고 싶어서' 성급하게 결혼했다가 이혼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난폭하게 얼룩지긴 했지만 다행히 이 남자와 결혼까지는 안 한 덕분에 이혼으로 끝나지 않고 '이별'로 마무리지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나는 매번 이 남자와 결혼까지는 안 했던 게 내 인생의 로또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다.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처음으로 1년 넘게 연애를 한 적이 있었다. 그전까지는 '저 5개월을 그냥 그냥 개기면서' 한 6개월의 연애가 가장 긴 연애였다. 저 '개기면서 한 연애' 바로 뒤에 만난 남자도 별로인 남자였기 때문에 이후로는 아예 진지한 관계를 맺는 자체가 부담스러워졌다. 그 이후 4년 가까이 짧게만 만났다. 진지해지기 싫어서 1-2달만 만나고 말거나 그냥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1년 넘게 안정적으로 연애를 하자, 또다시 안일하게 '큰 문제없으면 언젠가는 결혼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1년 반쯤 됐을 때 권태기가 찾아왔다.
그는 변했고, 무엇보다 뭘 숨기는 것 같았다. 애정표현과 연락이 극도로 줄은 것도 그렇고 내가 다닌 회사로 데리러 오라고 해도 절대 오지 않거나, 내가 그의 회사에 찾아간다고 했을 때 절대 못 오게 한다거나. 찝찝했지만 그의 핸드폰을 뒤지거나, 추궁했다가 내가 원하지 않는 사실을 발견할까 봐 '그냥 그냥 개기면서', 무슨 문제가 있다면 '알아서 해결하길 바라면서' 3개월을 더 만났다. 같이 노력해보자고 얘기했지만, 노력은 나 혼자 하다가 끝났다. 어쨌든 개긴 세월이 짧아지긴 했다. 나중에 헤어지면서 팩트 까 보니까 그 친구가 회사에서 잘리다시피 그만두게 돼서 그거 숨기느라 이리저리 거짓말하고 회사도 그래서 못 오게 하고, 이런저런 걸 내가 오해해서 그 친구가 바람피운 줄 알고 나도 같이 바람피우는 바람에 짧아진 거지만.
개기면서 하는 연애의 끝이란 게 이렇다. 둘 중에 한 명이 결국 헤어지지도 않고 다른 이성을 만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예전에 저 시기의 나와 정말 똑같은 고민을 한 여성의 글을 본 적이 있다. 30대 초반의 연인인데 남자 친구의 애정이 예전 같지 않다고, 권태기를 어떻게 극복하면 좋겠냐고. 베스트 댓글은 아니었지만 인상적인 댓글이 기억난다. 댓글 작성자는 자신이 40대 기혼 남성이라고 밝히곤 이렇게 충고했다.
-나는 미혼 여성, 혹은 남성들이 왜 그렇게 권태기를 극복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오래 만났다고 꼭 인연이란 ‘법’도 없고 결혼까지 가야 된다는 ‘법’도 없습니다. 기혼이라면 아이도 있고 서로 희생하고 맞춰서 이뤄놓은 삶이 많기 때문에 극복하려고 해야 옳겠지만, 미혼인데 애정이 식었으면 극복하지 말고 그냥 새로운 사람 만나 보세요... 결혼하고, 시간 지나면 언젠가는 안 참고 싶어도 참아야만 하는 삶의 방식도 곧 겪게 됩니다. 제발 이 연애, 저 연애 많이 부딪히고, 스스로가 어떤 걸 참을 수 있고 어떤 걸 못 참는 사람인지, 겪어보세요. 안 참아도 될 때 안 참아야, 참아야 할 때 참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