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1화에 이런 대화가 나온다.
현서 : 의사 선생님은 좋겠어요.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면 되니까. 인생 쉽죠?
선우 : 무슨 말이에요.
현서 : 보통은 자기 불행을 깔고 앉아 뭉개면서 살거든요. 용기가 없어서?
선우 : 구차한 변명이라는 거 스스로도 알죠?
현서 : 주저앉은 곳에서 한 발 내딛는 것도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구요. 선생님 같이 잘난 분은 이해가 안 되시겠지만.
별반 다를 거 없다는 선우의 말에 현서가 가시 돋친 말로 물어온다. 남편이 때리느냐고. 아니면 돈 빼가냐고. 그러자 지선우가 한숨을 내쉬곤 남편한테 여자가 있는 것 같다고 털어놓는 바로 그 장면이 나온다.
맥락을 아시는 분도 많겠지만 부연 설명하자면, 현서는 데이트 폭력을 가하는 남자 친구를 안쓰러워 버리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바텐더, 출장 뷔페 아르바이트 등, 서비스직을 생계 수단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20대 여성이다. 그리고 지선우는 성공한 가정의학과 의사이면서 근무하는 병원의 부원장이고.
주저앉은 곳에서 한발 내딛는 데 절실한 금전적인 힘이, 현서에게는 없지만 선우에게는 있다.
‘주저앉은 곳에서 한 발 내딛는 것도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라는 말에 나 역시 한 발 내딛던 순간이 떠올랐다.
내가 29세에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고 서울에 올라가겠다고 했을 때 응원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말렸던 사람들도 많았던 이유. 말렸던 사람들이 무거운 어조로 말렸던 기억이 난다. 이상 말고 현실을 생각하라고.
말렸던 이유는 내가 ‘주저앉게 될까 봐’ 였을 것이다. 도전에는 시간과 노력이 들고 그게 생각대로 안 되면 ‘주저앉게’ 되는 상황이 이어지니까. 내가 그렇게 될까 봐.
슬프게도 도전=성공이라는 공식은 대다수에게 유효하지 않다. 누군가에겐 유효할 수도 있지만 그건 아주 극소수에게만 유효한 공식이다. 그렇다고 없는 공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드라마 속 현서의 상황이 매우 극단적이긴 하지만 그녀나 내가 겪는 세상은 별반 크게 다르지 않다. 주저앉은 곳에서 ‘새로 뭘 해보는 게’ 쉽지 않다. 시나리오 쓰는 능력은 시나리오 쓰는 것 말고는 쓸 데가 없는데, 다른 일을 하려고 하면 내밀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가끔 글과 관련된 모임이나 독서모임에 가면 간단한 자기소개를 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과 동시에 내가 ‘예전에 영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었던 사실을 오픈한다.
더 이상 도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제 내가 시나리오 작가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음에도 과거에 지망생이었던 걸 오픈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도전에 실패한 인간도 ‘얼마든지 있다는 걸’ 그리고 ‘불행하지 않다는 걸’ 기회 될 때마다 틈틈이 드러내고 싶기 때문이다. 다시 도전할 생각이 없는 이유는 그게 결국 불행을 깔고 앉아 뭉개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도전에는 돈이 든다. 도전을 계속한다는 건 '되돌려 받을 수 없는 돈'이 내 꿈의 댓가로 계속 들어가는 일이었다. 더 이상 꿈에 대해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
세상은 실패자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지 않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도 모른다. 아니면 최고은 씨처럼 죽기라도 해야 그 이름이, 시나리오 작가라는 존재가 세상에 있음이 알려진다.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다.
내 주변의 지인들은 자신이 현재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거나 혹은 지망생이었던 걸 드러내는 경우가 많지 않다. 아직 데뷔를 못 했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하며 글 쓰는 경우가 많아서기도 하지만, 소소하게 당선된 공모전과 이후의 인맥들을 통해 웹툰, 웹소설 작업을 하게 되어 그걸 직업으로 삼게 되고서도 오픈하지 않는다. 그 정도면 꿈의 맥락에서 아주 벗어난 삶은 아닌데도, 벌이가 많지 않거나 유명한 작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이 생각하는 완성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내 실패가 전혀 부끄럽지 않다. 그들과 다르게 아예 ‘영화나 글과는 상관없는 직업’을 갖게 된 나는 그냥 ‘회사원’이 아니라 ‘꿈에 실패한 평범한 회사원’이라는 이 자리가 어쩌면 완성된 내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독서모임에서 내가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었다는 말에 누군가가 감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난 독서모임이 이게 참 좋은 거 같아요. 다들 사회에서는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이런 게 메인이지만, 여기 오면 ‘글을 썼던 사람’ 혹은 ‘글을 쓰는 사람’인 게 메인이고 1순위인 거잖아요. 일, 직업은 그냥 살기 위해 하는 부차적인 생존 수단인 거고.
그 분은 틀렸다. 독서모임을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그 짧은 몇 분 만에 누군가에게 나라는 사람을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지만 그분은 내 말을 완전히 오해했다. 내 인생은 일이 1순위다.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었다는 사실을 오픈한 건 그냥 팩트여서이기도 하지만,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도전했던 꿈에 실패한 인간이 있을 수 있고, 아무리 노력했다고 해도 꿈에 실패한 게 그렇게 큰 인생의 실패는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 이야길 너무 많이 하는 게 TMI 일 것 같기도 했다. 이제 글은 내 인생에 1순위가 아니다. 절대 일이 부차적인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과거에 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아직도, 어쩌면 영원히 글을 인생의 메인이라고 생각하고 일은 부차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할 거라고 믿는지 의아했지만 생각해보면 결국 우리는 모두 오해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만약 나를 먹여 살리는 게 글 작업이었면 글이 1순위이겠지만. 모두들 아시다시피 만약은 아무 힘이 없다. 글은 나를 지켜주지도 먹여살리지도 못했다. 반대로 일과 돈은 꿈만 보고 눈먼 사람처럼 달려갈 때나, 혹은 꿈을 포기한 지금이나, 가족으로부터 독립한 현재의 상황을 지탱해주는 고마운 부분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글을 의인화해도 된다면, 내가 돈을 벌어서 ‘글’을 써주고 있으니 내 글이 나한테 ‘고맙습니다’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내가 아니면 꿈도 못 꿨을 세상 밖으로, 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꺼내주고 있는 거니까. 상상은 여기까지만 하자. 내가 갑자기 왜 글에게 의인화까지 시켜가며 감사를 받으려는 건지 모르겠다.
원래 하나의 특별한 자리를 갖기 위해 수천, 수만 명이 노력하는 게 일반적인데 모든 이가 꿈을 꾼다고 다 이뤄지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나 역시 꿈을 못 이룬 수천, 수만 명 중의 하나일 뿐이다. 대단할 것도, 초라할 것도 없다.
분명 죽도록 글을 쓰는 시기는 나에겐 없으면 안 될 시기였다. 글을 쓰는 게 너무 좋았던 시기가, 글 쓰는 일 말고는 다른 일을 꿈꾸는 게 불가능한 짧지 않은 시기가 있었지만 내 여건에 맞춰 충분히 도전해보고 부딪혀 보았기에 지금의 회사 생활이 고통스럽지 않다.
이제 영원히 지나가버리긴 시기이지만, 그 시기가 없었다면 나는 꿈에 도전하지 못한 것 때문에 분명 계속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꿈은 이루는 사람보다 실패하는 사람이 많은 게 당연한 사실이며, 도전할 만큼 도전한 이후여서 그런지 내 실패를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다. 그때 뜨거웠던 그 마음 덕분에 행복했다. 하지만 훗날 다시 시나리오를 써볼 생각은 없다. 그때는 그때대로 소중하고, 지금은 지금대로 행복하다.
그리고 자랑스러울 건 없지만 어쨌든,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보다는 좀 더 멀리 나간 발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주저앉지 않고,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