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는 과대망상증 환자였다.
성범죄와 무관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실행에 옮기지 않을 남자들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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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나 영화에 보면 치명적인 어떤 문장에 꽂히는 경우가 있다. 예술과 문학뿐 아니라 신문 기사에서도 그런 꽂히는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 그 기사 속 4번째 문단은 저 문장으로 시작한다.
성범죄와 무관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실행에 옮기지 않을 남자들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고백하자면, 난 거의 초등학생 때부터 과대망상증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성폭행당할지도 모르다는 망상. 20년 가까운 시간을 그 생각과 함께 살았다. 병원에 가서 '당신은 과대망상증 환자입니다.' 진단을 받은 건 아니지만 아마도 맞을 것이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못 할 때도 있었으니까.
어릴 때부터 내 머릿속에선 1대 1로 만나는 모든 남자들이 내 머릿속에서는 잠재적 성폭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분류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는 겁이 많을 수 있어 그렇다 치더라도 성인이 된 이후에도. 심지어 그쪽이 아니라, 내가 호감을 갖는 남자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살면서도, 꽤 털털한 인간인 척 굴면서도 나는 남자들을 ‘항상 의심했다.' 20대 후반 어쩌면 30대 초반까지 그 과대망상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웃기는 생각이다. 심지어 모순적이기도 하다. 남자들이 나에게 호감을 가져줬으면 하면서도 그랬으니까.
내 공포심, 혹은 과대망상은 인터넷이나 영화 속 첫 경험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걸 보고 나서였을 수도 있고 어렸을 때 겪은 5살과 15살 때 겪은 2번의 강렬한 성추행의 기억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맨틱한 첫 경험이나 달콤한 스킨십을 묘사한 소설이나 영화도 많이 보았는데도 남자와 내가 단 둘이 있다고만 생각하면 로맨틱한 감정보다는 공포심이 먼저 들었다.
그 공포심의 뿌리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 기반한다.
1. 성추행당했을 때 겪었던 시각적, 심리적 공포
2. 나의 물리적인 힘이 대부분의 남성들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약함
하나는 경험, 하나는 팩트다. 나는 이 두 가지를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내가 만났던 남자들 중에 내 의사와 관계없이 물리력으로 어떻게든 성관계를 하려고 했던 남자의 수는 극소수였고, 대다수는 정상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 친밀감과 신뢰가 쌓여, 서로 그래도 되겠다 싶은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리고 서로의 감정을 충분히 확인한 이후에 그런 소위 ‘성’스러운 관계들이 이루어졌다. 치기 어린 시절, 사랑이 아니거나 연인이 아닌 상태에서 감정을 확인하기도 전에 분위기에 휩쓸려 버린 적도 있었지만 원칙은 있었다. 안전하게 느껴질 것. 하기 싫을 땐 언제든 그만둘 수 있을 것.
남자와 1대 1로 만나야 하는 상황이 있을 때마다 나는 그들이 갑작스레 밀폐된 공간으로 나를 유인해 갑자기 성관계를 요구할지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가정 따위는 들어올 틈이 없다. 그 사람의 평소 인성이나 성격, 그동안의 친분 관계, 과대망상은 그런 걸 봐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단 둘이 있어야 하는 상황의 경우, 그걸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두려움이 많은 성격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걸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잘 알고 있다 보니 나는 내가 뭔가를 두려워한다는 걸 극복하고 싶어 졌다. 무엇보다 ‘언제까지 스킨십을, 성관계를 두려워해야 한단 말인가’ 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사람이 여든까지 산다 치면 20대 중반의 나에게 앞으로 50년 이상 더 두려워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렇게 살기 싫었고, 그래서 나는 두려워하면서도 남자를 만났다.
결과적으로 내가 두려워하던 일은 거의 없었다. 거의라는 말은 있기는 있었다는 말이다. 수백, 수천 번의 상황 속에서 딱 두 번 있었다. 게다가 돌이켜 생각하면 수백, 수천 번의 상황들 대부분은 1대 1의 '남과 여'로 만났다기보다는 '인간과 인간'이 ‘무슨 감정이 있어서라기보다 일이나 공부, 혹은 어떤 필요로 해서 만난 것’이었다. 핑크빛 분위기든 공포 분위기든 어떤 것도 있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그냥 ‘한 인간’을 만나는 것뿐이었는데 나만 지레 내 앞에 있는 남자가 ‘언제든 강력한 물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인간’이라 의심하고 두려움에 떨며 ‘평범한 인간’을 연기했을 뿐.
하지만 내 의심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왔다. 안 왔으면 더 좋았을, 그런 순간이 딱 두 번 있었다.
https://brunch.co.kr/@ddocbok2/38
https://brunch.co.kr/@ddocbok2/39
한참 미투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할 때 딱 한번, 한 언론사 메일로 '퍼스트 클래스'라고 쓴 저 내용을 토대로 제보를 한 적이 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보다 더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거나,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인물들의 성폭행 사건이 많다 보니 아마 내 메일은 읽히지도 않았을 것 같다. 내 이름도 실명이고, 저 가해자들도 실명인데 아무 일도 없다.
그냥 내가 저 글을 쓴 게 다고, 세상은 그대로다. 나는 출근해서 일하며 살고, 저 두 사람들도 어디선가 평범한 가장으로 살면서, 출근해서 일하고 밥벌이하고 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좋은 아빠, 괜찮은 남편, 착한 아들로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존재도 대단하지 않고 가해자들도 그리 유명인이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지만 물리적으로는 입은 피해도 없다. 저 둘은 아무 고통 없이 잘 살고 있을 것이고. 난 원래 사람 잘 안 믿어서 사람에 대한 신뢰도 딱히 잃지 않았다. 이런 별 볼 일 없는 팩트만으로는 저들을 어떻게 할 방도가 없나 보다. 더 분노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분노의 크기가 처벌의 크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분노가 조절이 된다. 어느 선 이상 분노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속은 쓰리다. 그럼에도 언론이 기사 소재로 채택하는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팩트보다 임팩트니까 이해는 한다. 게다가 지금 성폭행 관련 법 조항에서 성폭행의 기준은 '물리적 폭행과 협박'이 필수요소인데 내 피해 경험에는 내 순발력 덕분에, 두 번 다 그럴 일이 없었다. 사실 성폭행의 기준은 '상대방의 동의 여부'로 바뀌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어쨌든 내 앞에서 실패했다고 다른 데서도 그들의 시도가 실패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저들이 딱 한 번만 실수로, 하필 나만 재수 없게 성폭행하려고 그랬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언론사가 내 메일을 안 읽었을 것 같지만, 읽었다고 해도 그놈의 임팩트가 없어 대중들에게 주목받기 힘들어서 선택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 씁쓸했지만 더 이상의 노력은 하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사건 사고가 너무나 많은 나라니까.
성관계 자체가 무섭기 때문에 성폭행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영화 <펄프 픽션>에 보면 자신보다 체구가 작은 백인 남자한테 몸이 포박되고 총으로 협박당하고 강간당한 거구의 흑인 깡패가, 기회를 봐서 그 백인을 쏴 죽이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그 백인 살해를 도와준 인물에게, 자신이 강간당한 걸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한다. 강간이 이런 거다. 거구의 흑인 남성조차 그 분노를 풀기 위해선 총으로 쏴 죽여야 할 만큼 불쾌한 일.
그렇다. 이건 우선 생물학적으로도 불쾌하고, 성별 및 인종을 넘어서까지 불쾌한 일이다. 일단 성적 쾌락은 ‘몸이 위험한 상태’에서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다. 로맨틱한 분위기까지 안 가더라도, 사랑인지 아닌지 모르더라도, 최소한 '안전하다고 느끼는 상태에서, 둘 다 동의한 상태에서'라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그런데 한쪽이 원하지 않더라도, 힘 쎈 쪽이 힘을 휘둘러, 혹은 속여서, 덫을 놓아서, 어떻게든 해버린다는 것 때문에 성폭행이 무섭고 불쾌한 것이다.
<펄프 픽션>의 흑인 깡패가 느꼈을 공포와 불쾌감은 물리력 약한 여자들이 겪고 나서 느낄 불쾌감과 공포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도 그는 강간범을 총으로 쏴 죽이기라도 했지, 법은 아직 솜방망이다.
여하튼 나는 끊임없는 내 과대망상 덕분에 내 몸을 지켰고, 지금은 오래된 친구같이 편안한 과대망상이라는 안전하고 무거운 갑옷을 벗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두려움 속에서도 계속해서 남자들을 만났다. 50년을 더 두려워할 순 없었다. 위험한 상황 속에서 거짓말해야 살 것 같으면 거짓말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대부분의 남자들은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할 뿐 어떻게 하려고 하는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런 내 경험들로 인해 남자들에 대한 신뢰가 쌓여가며 여성을 성적 쾌락의 존재로만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합리적 의심이라고 생각했던 게 이제는 과대망상이라는 걸 인정할 수 있을 만큼 세상엔 범죄자인 남자보다, 괜찮은 남자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과대망상을 버릴 수 있었다. 그냥 무턱대고 버린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성범죄와 무관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실행에 옮기지 않을 남자들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그렇기에 성범죄와 유관하고 지금 이 상황에서도 반성하지 않고, 호기심이었다고, 그 방에 들어간 것만으로 범죄자 취급당해야 하느냐고 항변하는 남자들은 존중해줄 가치가 없다.
미드 <굿 와이프>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악당에게 주말이 어딨냐.
악당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푹 쉬는 동안에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우린 악당들에 비해 많이 게을렀다. 우린 지금보다 더 뜨겁게 분노해야 하고, 법도 우리만큼은 분노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라도 악당보다 우리가 더 진화해야 하니까. 악당들이 교묘하게 진화하는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다. 어쩌면 악당들의 노력과 기술의 진화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우리 대다수는 이미 퇴화한 상태일지도 모르다. 우리도 진화해야 한다.
세상에 영웅은 없다. 이렇게 확신하는 게 성급한 일일까.
어쩌면 정말 운이 좋은 몇 명쯤은 영웅을 만나는 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겪을 뻔했던 성폭행을 막아준 건, 법과 제도나 영웅이 아닌 나의 과대망상이었다. 우리 모두가 영웅을 가질 순 없지만, 그리고 나처럼 과대망상을 가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좀 더 나은 법과 제도를 가질 수는 있다. 우리가 노력하고, 판단을 하고 처벌을 내리는 분들이 받아들여준다면. 세상을 뒤엎듯 바꿀 수는 없지만 그렇게 조금씩 바꿀 수는 있지 않을까.
좋아하는 구절 중에 이런 게 있다. 완벽보다, 진전. 조금씩, 그러나 계속 진전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