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피해를 준 건 아니지만
얼마 전 함께 시나리오를 쓰는 수업을 듣고 난 후, 수업 팀원들과 공모전을 함께 준비하자고 만든 스터디 그룹 채팅방에서 일방적으로 나왔다.
그 채팅방을 나오기 전, 내가 이 모임에 더이상 나올 수 없겠다고 쓴 이유는, 팀원 중 한 명이 쓴 내용이 스토킹을 하는 남자의 일방적 사랑 이야기를 그린 시나리오가 있는데 그 글을 읽는 게 불쾌하고 고통스럽고 소름끼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나도 원하지 않는 상대로부터 스토킹을 당한 적이 있어서 그 글을 읽어드리기 싫고, 글에 대한 피드백도 드리기 싫으며, 그 행동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그 팀원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스터디를 그냥 차라리 빠지겠다고 했다.
처음, 어떤 내용인지 모르고 읽었을 때는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시나리오라는 것은 쓰는 것은 당사자가 쓰더라도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피드백을 받고 나아지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처음 그저 그랬던 시나리오라도 피드백을 제대로 받게 되면, 말하고 싶은 큰 줄거리는 변하지 않으면서 디테일은 추가되고 거칠게 흘러가던 이야기 전개 방식은 정교해지면서 읽어볼 만하게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필요한 부분이 추가되고 불필요한 부분은 빠지면서 시나리오는 조금씩 나아지게 되지만 쓴 사람은 자신의 글에서 안 좋은 부분이라 해도 잘 걸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을 스터디 때마다 새로 고쳐 올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고친 글을 다시 읽어주어야 한다.
두 번째 모임 며칠 전 그 작품을 읽어야 해서 두번째로 수정된 그 파일을 여는데 감정이 불쾌하다거나 이런 게 아니라, 심장이 빨리 뛰는 게 느껴지면서, 팔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읽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글자들이 아직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읽기 싫었다. 며칠 뒤 그걸 이유로 단체 채팅방을 나왔다.
하지만 그게 스터디 그룹에서 빠지는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나는 그 팀원의 글을 읽기 전부터, 그러니까 함께 시나리오 수업을 듣고 있는 기간에 이미 시나리오 작가라는 꿈을 그만 접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업이 3번 정도 남은 어느날, 시나리오를 쓰다가 든 생각이었다. 수업하는 동안 내 시나리오의 분량을 늘리고, 적절한 에피소드인지 점검받기 위해 써서 올리기는 했지만, 포기해야 하겠다고, 문득 이제는 진짜 노력할 만큼 했다고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와 달리 수업을 같이 듣게 된 분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눈부신 기대를 갖고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몇몇 부분이 어설프긴 하지만 완성만 하면 자신의 시나리오로 영화계에 입봉을 하는 게 매우 현실성 있는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이름 앞에 시나리오 작가 라는 타이틀을 달 수 있게 되면 지금 다니는 회사를 때려치우거나 혹은 휴학한 학교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 현장에서 작가로 일할 수 있게 될 거라는 희망을 갖고 있는, 그런 게 눈빛에 보였다.
물론 그들 중에 누군가에게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꿈에 도전해 볼 만큼 도전했고 문득 영화화되기에 적합한 소재를 발견한 게 아까워서 쓰고는 있지만, 그 글을 완성을 할지 안할지도 모르고, 그것과 별개로 어느 정도 시나리오 작가의 꿈을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번 희망에 부푼 화기애애한 수업, 그리고 뒷풀이에서 팀원들에게 이런 내 감정을 고백하는 게 찬물을 끼얹는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수업이 끝나면 서서히 연락이 끊길 거고 그때 조용히 혼자 꿈을 접으려고 하고 있었다.
이 수업 끝나도 우리끼리 스터디 계속 해요! 하더라도 잘 깨지는 게 시나리오 스터디였다.
하지만 왠일인지 이 스터디는 뭔가 끈끈해져 있어서 공모전이 몰린 여름에서 가을까지 계속될 분위기였고 나는 내 감정을 숨긴 채 계속 스터디를 나갈 수는 없어서 말할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 문제의 시나리오를 읽고 마침, 저 글의 내용이 불쾌해서 스터디 더이상 못 나가겠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나도 모르게.
딱히 내가 내세운 이유로 피해 입은 사람은 없지만, 왜 진짜 이유를 내세우지 않고 갑자기 나타난, 다른 , 생각하지도 못한 이유를 진짜 이유로 둔갑시킨 건지 나도 한동안 알 수 없었다.
진짜 이유를 말한다 해도 사람들이 내 감정에 전염되어 자신의 꿈을 포기할 것도 아닌데 왜 내 마음을 숨겼는지 계속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그 마음의 윤곽을 이제야 조금씩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 진짜 밑바닥에 깔려있는 마음과 상황을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기 싫었던 거다.
그들의 꿈은 이제 시작이고 반짝거리려고 하는데 내 꿈은 달릴 만큼 달리고 체력이 소진되서 이제 힘을 빼고 편안한 곳에서 휴식을 원하고 있다는 걸 그들이 알면 약해보일까봐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다.
이런 내 마음이 나약하고 비겁한 것일까.
모르겠다.
초라하진 않은데 들키기는 싫었던, 그게 진짜 내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