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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나보고 틀렸다고 해도 그들이 틀렸을 수 있다.

그들 중 누군가는 나에게 일상생활 가능하냐고 했다.

by 시은

예전에 <아빠를 부탁해>라는 예능이 있었다. 그때 가장 핫했던 출연자는 배우 조재현과 조민기였는데 나는 그때 왠지 모르게 두 사람의 느낌이 쎄했다. 정말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는데, 뭔가 좋은 이미지의 장막으로 다른 무언가를 덮고 있다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그 방송은 꽤 인기가 있어서 방송 다음날이면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스윗하고 좋은 아빠’인 그들의 칭찬과 방송 짤이 올라왔다.


어느 날, 그들을 칭찬하는 게시글에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댓글을 단 적이 한 번 있었다. 화면에 보이지는 좋은 아빠 이미지가 진짜 다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사실 조민기, 조재현 그 둘을 볼 때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유인해서 성폭행하려던 환경단체 활동가였던 유부남 새끼가 자신의 카톡 프로필은 항상 와이프와 어린 딸 사진으로 해놓는 게 떠올랐었다. 그리고 데이트 폭력을 행사한 예전 남자 친구 놈도 항상 카톡 프로필 사진을 자신이 조카바보인 것처럼, 아이를 좋아하는 순수한 남자인 것처럼 해놓은 것도 좀 떠올랐고. 아니,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남자 친구 놈은 ‘진짜 아이를 예뻐하고 좋아하는 성격’이긴 했다.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자기 여자 친구가 자기 말 안 들으면 욕을 하거나 때려도 된다는 생각이 공존하고 있었을 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다고 해서 그 게시판에 ‘제가 예전에 유부남 새끼한테 성폭행을 당할 뻔 한 적 있는데 그 유부남 새끼가 항상 프로필 사진을 와이프랑 애 사진 올려서 가정적인 척하는데 이 두 사람도 그럴 것 같아요.’라는 개인사를 담은 댓글을 쓸 수는 없어서 ‘화면에 보이지는 좋은 아빠 이미지가 진짜 다는 아닐지도 모른다, 왠지 모르겠지만 강조할수록 가려지는 뭔가가 있을지 모르는 게 사람 본모습이다’ 뭐 이런 내용, 그냥 뭔가가 있을 것 같다, 고 썼다. 증거도 없고 설명할 순 없지만, 그냥 안 쓰고 넘어갈 수는 없는 강렬한 촉이 왔었다.


그리고, 내 댓글에 악플이 수십 개 달렸다. 지금 기억나는 거 몇 개만 간추리면 이런 내용이었다.


-저렇게 생각 꼬인 사람이 세상에 있구나. 불쌍하다.

-동정해줍시다. 이렇게 사람을 어떻게든 깎아내리는 사람이 누구와 제대로 지내겠습니까. 친구도 얼마 없을 거 같아요.

-이렇게 살게 놔둡시다. 그리고 글 삭제하지 말고 꼭 두세요. 조민기 씨, 조재현 씨 매니저나 기획사에서 이글 캡처해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게. 고소장 받고 울고불고 빌어봐야 세상이 안 만만한 거 알죠.

-이 글 쓴 사람, 지 아빠 개 나쁜 놈인가 봄, 지가 사랑 못 받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아빠가 다 안 좋은 사람들로 보이나 보죠.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또 다른 호감 받는 연예인들 기사 있으면 가서 까내리실 듯.

-나는 이 사람이 진짜 불쌍한 게, 저런 좋은 아빠 모습을 보면서도 나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게... 뭔가 이 분 일상생활 불가할 듯. 뭐든 걍 다 안 좋게 보는 사람일 확률이 높음.


더 많았지만 대충 이 정도만 기억이 난다. ‘명예훼손’, ‘고소’ 라는 단어에 움찔해서 내 댓글이 그렇게 공격적이고 남의 명예를 훼손하는가 싶어 다시 찬찬히 읽어봤지만 막연한 의심성 댓글이 고소까지 당할 내용은 아니었고 삭제하면 뭔가 내가 물러서는 것 같은 기분도 들 것 같았고, 제발 한 명만이라도 내 편을 들어주는 댓글을 받고 싶은 마음에 삭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익명 게시판의 글이 다 그렇듯, 그 게시글 자체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삭제돼서 내 댓글은 내편을 만나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 아빠, 나쁜 아빠 아니다.




게시글은 사라졌지만 내게 달린 댓글 중에 잊히지 않는 게 있었다. 일상생활 불가능할 거 같다는 댓글. 아주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성폭행당할 뻔한 순간, 나는 별주부에게 속아서 용궁에 끌려간 토끼 뺨치는 순발력으로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몇 년이 지났어도 그 순간이 떠오르면 '머릿속에 불이 나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서' 일이 손에 안 잡혔다.


그 순간을 잊으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떠올리려고 하지도 않았으나 한 반 떠오르면 그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고 그래서 머릿속이 그 순간을 떠올리는 거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두뇌가 멈춰버리는 바람에 정말 어이없는 실수를 하는 날도 있었다.


누가 봐도 많이 실수를 했던 날, 대표님이 나를 불렀다. 오늘 왜 이렇게 실수 많이 하냐고. 집에 무슨 일 있느냐고. 비록 대표님이 여자 대표님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사실은 제가 몇 년 전에 성폭행당할 뻔했던 일이 있는데 그 일이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는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오늘입니다. 이해 좀 해주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들의 범죄가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을 때, 솔직히 나는 내 촉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가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한 건 아니라는 생각에, 내 촉에 대한 안도감을 느꼈다. 일상생활 불가할 정도로 꼬였던 게 아니라, 내가 겪었던 일로 인한 내 생존의 촉이 보내는 신호가, 나로 하여금 그 날의 댓글을 쓰게 한 것이었다. 비록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지만.


내가 어떤 미친 촉을 가졌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정준영이 여자 친구와의 성관계 동영상을 찍었다고 기사화되었을 때 그의 변명을 믿었다. 호기심으로 인한 한순간의 실수, 그 말이 진짜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내 촉이 모든 사건, 사고에 발달해 있는 건 아닌 것이다.


나는 그당시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사건이 터지기 전에 이미 정준영이 뭔가 성적으로 이상할 것 같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었다. 아마, 그 사람들에게도 내가 못 느꼈던 촉이 있었을지 모른다.


가끔, 자신이 느끼는 어떤 사람에 대한 촉이 세상이 보여주는 이미지와 다를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촉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이 다 틀렸고 내가 맞을 수도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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