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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Jul 11. 2020

예술은 왜 실패하면 안 되니

모든 분야, 모든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실패한다. 그래도 된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 1년 전의 일이다. 내가 다니던 영상매스컴학부에서 과가 총 5개였는데 그중 영화과는 분리되어 아예 임권택 영화예술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우리 학교는 서울의 현역 드라마 작가, 영화평론가, 방송작가들을 교수진으로 꽤 많이 채용해서 학교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려고 노력하는 편이었고, 그 일환으로 임권택 감독의 이름을 딴 학교까지 개설하게 된 것이었다. 그 노력은 대단하고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희한하게 나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왜 그랬는지, 임권택 영화예술대학의 커리큘럼을, 그분의 수업을 하나도 듣고 싶지가 않았다.


졸업하고도 나는 그 감독님의 커리큘럼을 듣지 못한 게 아쉽지가 않았다. 왜 듣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을까. 다들 '대가'라고 하는 분의 수업을.




2007년 어느 날, 나는 아빠와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아빠가 나에게 물었다


-이 영화, 감독이 누구냐.


종종 아빠와 영화를 보는 편이었는데 아빠가 감독의 이름을 물은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가 본 영화는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었다.


-이거, 임권택이라는 영화감독이 만든 거야, 아빠. <서편제>라는 영화 알지? 그거 만든 감독.


아빠는 이 감독이 유명하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고, 다시 한번 <서편제> 영화를 모르냐고 물어봤다. 아빠는 그 영화를 모른다고 했다. 나는 아빠에게 영화감독 이름은 왜 물어봤는지 물어보았다. 아빠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앞으로 이 사람이 만든 영화는 절대 안 보려고.

-왜?

-아버지라는 사람이, 아무리 양아버지라고 해도 딸한테 약을 먹여서 눈을 멀게 하는 내용이 싫어. 아빠가 봤을 때, 저 영화에 나오는 아빠라고 할 수 없어. 솔직히 아빠 기준에서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어.


나는 22살밖에 안 된 어린애였다.  

-예술을 위해서 그런 거잖아. 인생은 짧아도 예술은 오래 남는 거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것 같은 경지인데 안 되는 게 아까워서 그런 거잖아. 속임수를 쓴 거긴 해도 그래도 그 덕분에 많은 사람이 더 완벽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좋은 거 아니야, 아빠?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안 되니까 아까워서 실패하게 두기 싫으니까 그런 거잖아.


아빠는 진지하게 말하고 싶을 때 이름 대신 딸, 이라는 명사를 쓴다.

-딸. 아빠는 예술이라는 이유로 저런 행동이 당연한 것도 싫고, 저 양아버지 놈의 죄책감 없음도 싫어. 그리고 이런 내용을 영화로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보게 만든 저 감독 놈이 싫어.

-아빠, 그래도 저분, 한국 영화계에서 거장인 사람인데 놈이 뭐야. 아빠는 저런 거 만들 수 있어?

-못 하지. 근데 저 사람은 저런 거 만드는 게 일이니까 저걸 만든 거고, 저 사람도 아빠가 하던 일 하라고 던져주면 아무것도 못 해.  


그건 또 맞는 말이었다. 한평생 배를 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나는 걸으면서 아빠가 한 말에 반박할 지점을 찾아보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아빠, 아빠가 싫어한 양아버지의 선택이 없었으면 저 여자가 완성한 훌륭한 소리를 못 만들어냈을지도 몰라... 그럼 실패하는 거잖아. 그렇게 노력했는데.


아빠가 걸음을 멈추고 정말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실패하면 왜 안 되니?

-예술을 위해서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왕이면 완성하는 게, 성공하는 게 좋잖아.


아빠가 그 이상 분명한 것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잘 나가는 메이저리그의 야구선수들도 타율이 2할, 3할이야. 100번 중에 70, 80번은 실패하는 거라고. 사람들이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연습을 피나게 많이 했을 텐데, 몸이 망가지기 직전까지 연습했을 텐데,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지켜보는 곳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실패를 더 많이 하고 있어. 실패해도 돼. 누구든 실패해도 돼. 아무도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하지 않아. 그런데 예술이 뭐라고, 예술은 왜 실패하면 안 되니?


그때 나는 아빠의 말에 수긍하지 않았다. 나는 100편이나 영화를 만든 임권택 감독이 대단해 보였다. 영화 한 편 만드는 데 투자받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걸 100번이나 성공해낸 사람이었다. 그가 이룬 업적은 훼손하면 안 되는 위대한 일로만 보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영화라는 건 감독 혼자 만드는 게 아니라, 정말 박봉의 급여를 받으면서도 훌륭한 일에 보탬이 되고 있다는 생각으로 이 악물고 버틴 수십, 수백 명의 스텝 덕분이고, 그들은 최소한의 스포트라이트조차 받지 못하며, 결국 모든 스포트 라이트는 감독과 배우들에게만 돌아간다는 것도 최근에야 겨우 느낀 일이다.


어쨌든 그 당시의 나는, 임권택 감독을 존경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라는 공간에서 그를 눈앞에서 보고 직접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았다. 1차적으로는 나는 철저히 상업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싶었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은 '이제' 상업적인 시스템에서는 좋아할 리가 없는 것들이라 너무 지루할 것 같아서인 이유가 가장 컸지만, 무의식적인 배경에는 아빠의 말 때문인 이유도 있었던 듯싶다.


왠지 배워야 할 것보다, 배우지 말아야 할 것들을 더 많이 배울 것 같아서. 괜찮지 않은 태도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주입받을 것 같아서.  

    

이러나저러나, 나는 철저히 상업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자 했지만 되지 못했다. 실패했다. 하지만 실패할 수 있다는 걸, 그래도 괜찮다는 걸 안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고 실패해도 된다. 메이저리그의 야구 선수들조차, 세상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실패해도 괜찮은 것처럼. 성공하는 게 기분도 좋고 살기 편하기야 하겠지만 스스로 선택한 삶에서, 실패하고 성공하는 게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선택은 누가 대신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해야 한다. 그건 중요하다.  




이 이야기는 후일담이 있다. 저 영화를 보고 며칠 후 밥을 먹다가 아빠가 또 나에게 말했다.


-딸. 나, 우리 본 그 영화가 싫은 이유, 또 찾았어.

-뭔데, 아빠?

-양아버지 놈이 딸한테 안 물어보고 그랬어. 눈이 멀더라도 훌륭한 소리꾼이 되고 싶은지, 정말 그럴 생각이 있는지 딸의 의사를 정확하게 안 물어봤어.  


그때는 아빠가 자신의 의견이 맞다고, 내가 틀린 걸 인정하게 하려고 계속 징징거리시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빠 생각이 맞았다. 만약 딸이 훌륭한 소리꾼 대신, 자기 눈을 잃지 않고 그냥 평범한 소리꾼으로 살고 싶었다면, 거기서 멈춰야 하는 게 맞았다. 아마도 양아버지란 작자는 딸의 선택이 훌륭한 소리꾼이 되는 것보다 눈이 보이는 평범한 소리꾼으로 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몰래 약을 탄 걸 것이다. 실패했어야 했다. 훌륭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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