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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Nov 21. 2019

폼 재려고 그런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후회 없을 만큼 노력해보고 싶어서

대학교 때 일이다.


휴학을 여러 번 해서 몇 번째 휴학을 하고 돌아왔을 때인지 모르겠다. 신입생 중에 누가 봐도 스무 살이 아닌 오빠가 한 명 있었다. 나이 차로 판단했을 때 오빠지만 얼굴은 아저씨 같았다. 그래도 같은 20대였지만. 그 오빠 스스로도 자신이 강의실에 들어가면 교수로 오인받거나, 최소 조교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단 한 번도 신입생 취급을 받지 못했지만 그 오빠는 당당하게,


-저, 신입생인데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나보다 4살 위였다. 얼굴이 남들보다 조금 나이를 빨리 먹은 것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우리 학교, 우리 과에 입학한 그 오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미디어 관련 학과는 취업은 안 되더라도 배우는 건 또 전문지식이라 등록금이 비싼 편이었다. 그 방면으로 취업이 안 되면 딱히 어디 쓸 데도 없다.


 


과방에서 삼삼오오 공강 시간을 때우고 있던 어느 날, 패기 넘치는 신입생 한 명이 그 오빠에게 우리 학교 왜 들어오신 거냐고 물어봤다.


유명대학이 아니니 간판 따러 들어온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쓴 대본이나, 방송 기획안, 시나리오, 혹은 시나리오 기획안들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별의별 단점이 다 있어서 매주 시간을 쪼개 고생 고생해서 쓰고는 담당교수님한테 별의별 욕을 다 먹는 게, 그게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배워서 취업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취업돼도 월급이 높은 분야도 아닌데 어떻게 들어오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고. 


사실, 나도 좀 궁금했다. 그 오빠는 원래 멀쩡하게 다른 직업이 있었고, 자기 생활이나 소득에 크게 불만은 없었다고 했으니까.


-이렇게 욕을 처먹고 배워서 작가가 되면 제일 좋겠지만, 안 되더라도 나중에 나이 먹었을 때 나 사실 어렸을 때 문청(문학청년)이었어, 하고 말하고 싶어. 이유가 좀... 웃긴가?


과거에 ‘문학을 하고 싶었던 사람, 글을 쓰고 싶었던 사람’인 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일인지, 그때는 솔직히 배부른 소리 같았고 허세 같았다. 단지 그것 때문에, 비싼 대학 등록금 들여서까지 도전할 만한 일일까 싶었다.


하지만 지금 내 모습을 보니 알겠다. 작가도 결국 수많은 직업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그의 어리석은 선택이 이해가 안 간다고 생각했으면서 나 역시 똑같은 도전을 하고 말았다. 멀쩡히 밥벌이할 회사를 다니고 있었으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이유로, 그걸로 밥벌이하고 싶다는 이유로 29세에, 대책도 없이 서울까지 올라와서 도전을 하고야 말았으니까. 내가 걸어온 삶도 그 오빠와 똑같아지고 말았다. 할 수 있는 한 힘껏 노력했으나 그에 상응하는 성과는 없는 평범한 30대 직장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해보고 나니 그 오빠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그냥 마음이 ‘진짜’ 원하는 걸 20대가 저물기 전에 마음껏 하게 해주고 싶었던 거다.

그에 걸맞은 노력도 한껏 해보고 싶었던 거다.

더 나이 먹고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기 전에.



폼 재려고 그런 게 아니라 더 나이 들면 못 할 걸 아니까. 실패하더라도, 자신의 일생에서 뭔가를 꿈꿨던 시간을 제대로 갖고 싶었던 것이다. 인생은 한방이 아니라 한 번이니까. 그 단 한 번의 인생에 자신의 정체성에 작가라는 부분을, 혹은 작가 지망생이라는 부분을 가지고 싶어서.




그 오빠는 누가 나이를 물어보면 자기 나이를 말하며 꼭 조인성 얘기를 했다.


-81년생. 내가 이래 봬도 조인성이랑 동갑이야. 말하자면 동갑내기 친구인 거지.


그래 봤자 진짜 친구는 아니지 않냐고, 아무리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조인성 씨 기분 나쁠 거라고, 조인성은 오빠 모른다고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다들 말했었는데 지금도 그 비유를 들어서 자기 나이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예전에 말이야’라는 말을 하며 노력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그 순간이 그 오빠의 인생에서 황금기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걸 안다.


내가 지금 돌이켜 봤을 때 무엇을 거두고 거두지 못하고를 떠나, 그 시기가 가장 충만했다. 그때가 황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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