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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Aug 25. 2019

꿈 깨라고 말하지 않은 게 잘한 것일까

시간이 지나도 잘 모르겠는 것들

시나리오 수업을 듣다 보면, 어쩌면 대부분의 분야에서 그렇겠지만, 정말 누가 봐도 그 분야에 재능이 없다고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다.


당연하게도, 없을 수가 없다.


정말 그런 사람이 한 분 있었다. 소재나 인물을 봤을 때 제작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그런 내용을 쓰시는 분이었는데 그분의 글을 읽고 있으면 지루하고 기 빨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또 스케일은 컸다. 돈이 많이 들어가게 말이다.


한 사람당 한 대본을 가지고 여러 번에 걸쳐 피드백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분의 글을 여러 주 읽어야 했다. 인물 설정이며 배경 묘사 등을 열심히 쓴 글이었다. 자료조사도 정말 열심히 했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정보를 거기에 다 녹여내려다 보니 그래서 더 지루했다. 고칠 점들을 수강생들이 말해줬지만 그분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의 달라지지 않는 그 글을 우리는 매주 읽어야 했다.


아마 대부분의 수강생이 비슷한 마음이었겠지만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봐 그런 말을 하지는 못 했는데 선생님이 총대를 메시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리셨는지 마지막 수업이 한번 남았던 수업시간에 그 시나리오는 버리고 이제라도 새로운 시나리오를 써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이런 건 상업영화 시나리오가 아니라고 말이다.


그분이 충격을 받으셨는지, 정말 그러냐고 이게 그렇게 별로냐고 말해달라고 하셨다. 몇몇 분들이 그렇다고, 제작비가 많이 들어갈 것 같은데 사실 많이 보고 싶어 할 내용은 또 아니라고, 혹은 자신은 이런 내용 별로 보고 싶지 않다거나, 이런 인물은 요즘 사람들이 싫어하는 캐릭터라고 자기가 가진 생각들을 고백했다.  


그러다 나와 그분의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은, 제발 아니라고 말해달라고 하고 있었다. 그분이 듣고 싶은 말이 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눈빛이었다.


별로는 아니라고, 누군가는 좋아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 눈빛을 무시하고 내가 느끼는 바를 사실대로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분이 원하는 대로 말해주고 말았다.


-잘 모르겠지만...  저는 그냥 계속 써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어떤 시나리오가 잘 될지 안 될지는 솔직히 우리 중 누구도 모르는 거잖아요. 저도 제 취향은 아니지만, 스케일이 크다 보니 그림은 또 멋있게 나올 수 있는 시나리오이고, 이런 걸 연출하고 싶은 감독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잘은 모르지만, 좀 더 써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러자, 그분의 표정이 안도하는 것이 보였고, 그렇게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영화 시나리오라는 게, 어떤 게 팔릴지는 누구도 모르지만 누가 봐도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것도 있긴 있다. 그분의 작품이 그랬다. 그렇지만 난 저렇게 말하고 말았다.


요즘도 가끔 그때의 내가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한 말을 믿고 그 시나리오를 계속 썼을까? 혹시 다른 시나리오 아카데미에 가서 어떻게든 팔리는 글로 바꿔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까? 그런 연금술은 어디에도 없을 텐데.


희망을 가지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희망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한다고 해서 들을 것 같지 않아서, 내가 그렇게 미칠 듯한 설득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으니 솔직히 말한다고 들을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이미 모두가 했어도 이미 안 들었다는 이유로,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했다.


그런 꿈을 꾸다 깨는 날이 있다.


깨고 보면 아무 이득도 없지만 조금만 더 꾸고 싶은 꿈을 꾸다가 깬 날. 남들이 보기엔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나에겐 애틋한 느낌이었던 꿈을 깨는 일 말이다. 다시 자도 꼭 그 꿈이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깬 게 아쉬운 그런 꿈.


나는 그가 원한다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 좀 더 꿈을 꾸게 내버려두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닌 걸 알지만, 괜찮다는 말을 들어서 괜찮아지는 거면 그냥 그렇게 믿게 해주고 싶은 날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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