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 면접을 왜 봐, 내 면접에서 광탈인데
20살, 첫 소개팅 때 있었던 일이다.
-시은 씨 아버지는 군대 어디로 갔다 오셨어요?
군대 얘기는 ‘정말’ 친한 사이에서만 했으면 좋겠다. 지금 나이에도 군대 소재 얘기는 별로 즐겁지 않지만 20살짜리한테는 더더욱 군대 얘기가 즐겁지 않다.
나라를 지켜주는 일,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거랑 이야기 소재로서의 군대는, 또 별개다.
식상해 보여도, 여자 만나는 자리에선, 특히 처음 만나는 자리에선 차라리 연예인, 드라마, 영화 얘기하는 게 낫다. 대중문화는 이럴 때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라고 존재하는 지분도 크다. 그에 비해 군대는 나라를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 만큼 무거운 소재이기도 하고, 여자한테 점수 따라고 존재하는 소재도 아니니 소개팅, 미팅, 이런 곳에서 이야깃거리로 전락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소재를 이야기하는 순간 그 여자에게 점수를 잃는다. 그런데 이걸 모르나? 정말?
소개팅 자리에서 만난 이 남자는 자기가 해병대 출신인 걸 (정확히는 복무 중) 밝히고 나서 나의 아빠 군대 이력을 물었다.
‘제정신인가?’
처음 보는 남자 군대 얘기를 들어야 하다니. 그걸로 부족해 우리 아빠의 군 이력도 말해야 하다니. 내가 어려서 그랬던 게 아니라 이후에 남자 친구의 이야기라고 해도 군대 얘기는 듣기 싫고 친동생 얘기여도 안 궁금한 게 군대 얘기다. 이때의 경험 때문에 군대 얘기가 더 싫어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소개팅 약속 시간에도 40분 이상 늦어서 안 만난 상태지만 이미 별로였다. 원래 이런 건 기분이 반이상 먹고 들어가는데 이미 70% 이상 기분이 상했다.
약속 시간 안 지키는 사람, 남녀 불문 딱 질색이다. 특히 첫 약속 안 지키는 사람들, 진짜 싫다. 약속 시간 늦는 사람 중에 대단한 이유가 있는 사람 한 명도 못 봤다. 이날, 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깜빡하고 늦게 일어났단다. 어쨌든 나는 겨우 신입생이어서 대학 선배의 부탁이기도 한 데다 생전 처음 하는 소개팅이라, 사람 바람 맞히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이미 기분이 잡쳤지만 적당히 시간 채우고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첫 소개팅이라 꽃단장하고 나간 것도 빡쳤지만 그런대로 화를 숨기고 처음 소개팅 나온 여자의 역할을 그럭저럭 수행해내고 있었다. 나는 첫 딸이라 집안의 분위기를 밝혀야 한다는 무의식적 압박이 좀 있기도 하고, 사실 기본 리액션이 좋은 편이라서 어딜 가든 그부분만큼은 인정받는 편이다. 그날도 그걸 그럭저럭 했다. 대신 평소 하는 것만큼은 아니고 최소한으로. 그런데 그렇게 예쁘게 앉아 리액션으로 시간 채우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나 보다. 한참 떠들어대던 그가 우리 아빠 군 경력을 물어볼 줄은 몰랐다.
-아, 우리 아빠도 해병대이시긴 해요.
-아, 진짜요? 그럼 만약에 시은 씨랑 잘 돼서 아버지 뵈러 가잖아요? 그럼 아버님은 무조건 저 오케이 하실 거예요. 해병대 나온 분은 해병대 남자 무조건 좋아하시거든요. 아마 결혼 승낙도 그 자리에서 하시려고 할 걸요?
이런 멀쩡한 모자란 새끼. 너와 내가 아직 좋은 사이도 아닌데 왜 벌써부터 우리 아빠 면접 볼 생각을 해. 제대도 제대로 안 한 군인을, 이제 제대 얼마 안 남았다면서 싫다는데도 진짜 괜찮은 남자라며 굳이 이 소개팅을 하라고 한 그 언니가 원망스러웠다.
밥만 먹고 일어났다. 나와서 차 마시러 가자는 그의 말에, 사실 예의상 있어드린 거고 약속 시간 30분 이상 늦을 때부터 좀 불편했다고, 선배 얼굴 보기 미안할까 봐 바람 맞히긴 그래서 기다린 거였다고. 사실 죄송하지만 대화도 별로 안 통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연락도 지금부터 안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쓰다 보니, 그때는 나도 순하고 착했다 싶다. 저 상황 어디에서도 내가 미안해할 이유가 없는데 진심으로 미안해하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남자가 내 타입이 아닌 건, 그 남자가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 아닌가?
선배를 통해 한 번 더 만나볼 생각이 없냐고 연락이 왔다.
그 친구가 자긴 진짜 마음에 들었다고. 리액션도 좋고 성격도 너무 괜찮으신 거 같았다고 했다고. 자기가 생각해도 둘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무슨 근거로 내 마음에 안 드는 남자가 언니 기준에 잘 어울린다는 거죠.
언니, 죄송한데 그분 진짜 싫어요. 약속 시간 늦은 것도 싫었고 군인이 군대 얘기만 한 것도 싫었고, 블라블라. 언니가 그 친구한테 욕먹을까 봐 바람 안 맞힌 거지, 45분 기다렸던 것도 진짜 짜증 났어요. 블라블라 블라.
그렇게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는 메시지를 두 번째 전달했다. 시간 낭비하기 싫어서 구체적으로 말해줬는데 결과적으론 소용이 없었던 거다. 왜 한 번만에 말을 안 들어줄까. 저 정도 의사표현이 확실한 거절로 안 받아들여진다는 게 무섭다. 이 정도면 거절이라고 말한 내 의견은 그냥 무시한 거라고 보인다. 자기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그때 그렇게 정확하고 확실하게 내 의사를 전달했는데,
저 정도로 구체적으로 말을 해도 그저 튕기는 걸로 보이면 헤어질 때 욕이라도 하면서, 아니면 가방으로 줘 패면서 아주 정말 너란 남자와 상종을 하기 싫다고 말을 해줘야 하나. 겨우 소개팅에서?
나도 편견이 있었던 게 그 분 외모가 순하게 생겨서 정확하게 말하면 한번에 알아듣는 사람일 줄 알았다.
나중에 다시 그 선배를 통해서 들은 말로는 제대도 얼마 안 남았고 빨리 연애가 하고 싶은 마음인데 꽤 마음에 들어서 두서없이 말을 많이 한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했단다. 시간 약속 45분 늦은 건 왜 사과 안 하니. 늦게 나오면서 소개팅에 안 꾸미고 나온 건 왜 사과 안 하니. 그게 제일 기분 나빴는데.
제대하고 민간인 돼서 마음의 여유를 찾고 한 소개팅은 좀 달랐을까. 내 알 바는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