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거 아닐까.
대학교 1학년 때, 짧게나마 동아리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게 그곳에서의 일이었는데 그날, 누가 인터넷 뉴스에서 본 ‘여자들이 밤길에서 느끼는 공포’가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얘기를 나한테 한 것도 아닌데 누군가 말한 그 내용을 듣자마자 내가 아주 진저리 치게 싫어하자 남자 동기인 J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되게 의외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너는 진짜 그런 거 안 무서워하게 생겼는데. 너는 그런 데 겁 없을 거 같은데.
나는 어떻게 더 무섭다고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지, 뭐.’라고 하고는 책인지, 핸드폰인지 여하튼 원래 보던 것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내 귀로 동기의 목소리가 꽂혔다.
-너 같은 애도 밤길 무서워한다니까, 밤에 한번 몰래 놀라게 해보고 싶다, 얼마나 놀래는지 보게.
그 말을 듣자 피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인 것처럼 화르륵 피가 끓는 기분이었다. 내가 갑자기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한 번 해봐. 그딴 짓 하면 가위가 됐든, 칼이 됐든 주변에 있는 뭐가 됐든 생식기 잘라버릴 거야. 다른 부위 안 노리고 어떻게든 생식기 망가뜨려 버릴 테니까 한번 해봐. 실수로, 아니면 네가 자-알 피해서 다른 부위가 되더라도, 아주 어디 하나 잘라 버리거나 망가뜨릴 생각으로 덤빌 거니까 손이 됐든, 발이 됐든 어디 하나 잘려서 그날로 장애인 될 각오 정도는 하는 게 좋을 거다. 불편한 손모가지, 발모가지 쓸 때마다 그 날 일 생각나게 해 줄게, 그 일로 내가 콩밥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대략 이런 내용의 말을 했다. 저런 내용, 상상조차 한 적 없는 말이었다. ‘근데 내 몸 지키려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건데도 내가 콩밥 먹을 걸 계산에 넣어야 되나? 이제 스무 살인데 진짜 그런 일 생겨서 감옥살이하면 얼마나 살다가 나오는 거지? 정당방위 인정돼도 실형 사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와서 일하고 먹고살 수 있나? 대학교 졸업은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안 한다는 선택지는 생각할 수 없었다. 누가 나에게 위해를 가하는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아무도 절박한 위험상황에서 나를 대신 지켜주지 않는다. 심지어 부모님들조차도. 다행히 나에게 콩밥 먹을 일은 생기지 않았다. 어느 누구에게 더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동아리실은 크지 않았으므로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을 것이다. 모두가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적막 속에서 여자 선배 A가 말했다.
-얘, 그래도 말이 너무 심하다. 무슨... 뭘 어떻게 한다니. 어휴. 야, 그렇지 않니? 시은이가 말이 좀 심했잖아. J가 한 말이 그렇게까지 말할 일이야? J도 웃자고 한 말일 텐데.
내 말이 심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한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끔찍한 표현을 사용한 것도 안다. 그런데 성추행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남자에게, 어떻게 해야 세련되고 현명하고 똑똑하게 들릴 수 있게 말하는 것인지 방법을 잘 모르겠다. 그때도 몰랐지만,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냥 아주, 노골적이고 징그럽고 듣기 싫게 말해주는 것 말고는. 성추행을 겪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걸 겪을 때 딱 그런 느낌이다. 내가 겪어야 할 이유도 없고 맥락도 없으면서 끔찍하고 징그럽게 싫은 느낌.
안 궁금한데, 그런 사람들한테 세련되고 현명하고 똑똑하게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는 방법이 있긴 있나?
그 여자 선배는 딱히 나를 야단하겠다는 것보다 내 말로 인해 무거워진 그 무거운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한 것 같다. 그녀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내가 여자답지 않아서 여자 망신을 시킨다, 같은 생각. 자주 들었던 말이다.
아마도 이 아이를 이렇게 말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다, 싶었을 것이다. 말을 징그럽도록 무섭게 하는 이 신입생 여자애가 스스로 자신의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게 다수의 목소리를 들려주어야겠다, 싶었는지 A선배는 계속 주변에 동의를 구하듯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 그렇지 않니? 얘가 말이 좀 심했잖아, 그렇지?
그녀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견에 대한 동의를 구하려 애쓰는 동안 나는 저 야리야리한 선배는, 밤길에 한 번도 무서웠던 적이 없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녀는 집으로 가는 길에, 골목이라고 할 만한 어둑한 그런 길이 하나도 없나. 지금껏 살았던 곳이 모두 대기업에서 지은 아파트라 가는 길마다 아주 환해서, 어두운 길이 존재한다는 걸, 그래서 그 어두운 길을 반드시 지나야 하는 여자들이 있다는 걸 모르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무도 그녀의 말에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좀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나만 어두운 길, 남자의 등장 및 접근에 대한 공포를 아는 건가. 어두운 길만 위험한 것도 아니다. 나는 중학생 때, 심지어 밤길도 아닌 대낮의 외진 골목길에서 자신의 생식기를 몇 초간 꺼내 보이곤 도망갔던 내 또래 남자아이를 기억한다. 그래서 저때 내가 생식기를 어떻게 해버리겠다고 말한 걸까, 이번만은 가만히 안 놔둔다는 심정으로.
다른 선배가 말했다.
-근데 A야, 얘 말이 문제가 아니라 J가 먼저 하면 안 될 말, 한 거 아닌가.
고백해야겠다. 사실 저렇게까지 세게 말한 데에는 평소 J를 질투했던 마음의 지분이 있었다. 꼭 J만 질투했다기보다 여자 선배들의 귀여움을 받는 몇몇 남자애들이 아주 꼴 보기 싫었다. 모든 남자 동기들을 다 귀여워하진 않았지만 별 얘기 아닌 걸 해도 유독 귀여움 받는 남자 동기가 몇 있었다. 그중에 J도 있었던 것 같다.
언니들은, 여자애들이 친근하게 인사를 해도 받는 둥 마는 둥 잘 안 받아주는 편이었다. 그에 비해 저 (몇몇) 남자애들은 뭐라고 저렇게 귀여움을 받나 싶어 기분이 계속 안 좋았나 보다.
가끔 언니들이 공부하느라 우리 여자애들 인사를 안 받아주는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그러기에는 몇 분 차이로 들어오는 남자 동기들에게 분위기가 샤랄라 해질 정도로 반갑게 인사를 해주어서 공부 때문은 아닌 걸로 밝혀졌다. 나는 그게 질투가 났었던 것 같다. 그렇게 몇몇 남자애들을 얄밉게 보고 있던 차에 J가 어처구니가 없는 말을 했고 그 무신경함에 분노조절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이전부터 존재했던 질투 버튼과 밤길에 대한 공포심이 분노를 만나자 화학적 반응을 일으켰는지 저런 식으로, 말의 옷을 쓴 욕을 한 바가지 쏟아붓고 말았다.
J와 친분도 별로 없고, 대화를 많이 나눈 적이 없으니 그는 어쩌면 아직도 나를 미친년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심한 말을 해서 심한 행동을 막을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좋은 일 아닌가.
오래전 일이지만 이제는 J도 자신이 (장난으로라도) 행동할 뻔했던 말이 얼마나 사람들이 싫어하는 상황의 말인지 소름 끼치게 알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후일담 1.
J는 확실히 누나들이 좋아하는 타입이었나 보다. 그는 동기 중에 가장 빨리 장가를 갔다. 25살에 4살 연상의 누나와 결혼했는데 내가 J를 싫어해서인 것도 있겠지만 그 언니가 너무 아까웠다. 엄청난 미인이었는데 집 장만도 그 언니 쪽에서 다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 언니는 직장인이었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결혼 당시의 J는 취업 전, 아니 졸업도 한참 남은 학생이었다.
후일담 2.
J의 결혼식 한참 후, 거의 8-9년 후 동기들과 모인 일이 한번 있었는데 남자 동기들이 거품을 물면서 J, 의리 없고 재수 없는 놈이라고 욕을 하길래 왜 그러냐고 물어봤다. 그는 갑작스럽게 결혼을 준비하게 돼서 모든 사람들에게 모바일 청첩장으로 결혼 소식을 알렸었다. 어쨌든 동기 중 첫 결혼식이었으므로 친한 애, 안 친한 애 다 같이 가서 축하해줬다. 말을 꺼낸 남자 동기 말이 여자애들이야 와이프 때문에 불편해서 안 만나고 안 부른다 쳐도 남자애들은 따로 연락해서 밥을 사든 술을 사든 결혼 축하해주러 와줘서 고맙다고 식사 대접할 줄 알았는데 그 이후로 연락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욕하는 내용이 그런 거라면 내 생각엔 J 가 결혼하더니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충실하느라 그런 것 같아서 칭찬받아야 할 일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애들이 내가 싫어하는 남자 욕을 하는 걸 듣고 있자니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후일담 3.
저 날, 사실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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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이야기하다, 내가 갑자기 그때 언니들은 왜 그렇게 몇몇 남자애들만 귀여워했는지 모르겠다고, 남자애들 인사만 반갑게 받아줬다고 넋두리를 하자, 누군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야, 너 몰랐어? 남자 선배들은 남자애들 인사 잘 안 받아줬어. 쳐다도 안 봐. 대신 여자애들 동아리실 입장하면 눈에서 하트 나오더라. 이제 공평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