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은 Sep 16. 2020

여자들끼리 꼭 나눠야 하는 이야기

성당에서 미사가 끝난 후 복음을 전파하듯 그렇게

p.114-115

“그 사람이 여자를 너무 좋아해! 인간애가 넘쳐!” 이런 술자리 농담을 처음 듣고 두 번 듣고 세 번 들었을 때, 나는 그가 정말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좋아한다는 말인 줄 알았지 설마 상습적으로 성추행을 일삼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술자리에서 웃기는 얘기처럼 떠도는, 술 마시다가 그 자리에서 바지를 벗는 남자 간부 이야기는 또 어떤가?


서로 다른 매체에 있는 20대 여자 기자 셋이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다 어떤 남자 선배가 화제에 올랐다. 그 자리의 여성 셋은 그 남자가 성적으로 접근한 뒤 “술이 취해서 그랬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무마한 사건을 두세 건씩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짐했다. 성당에서 미사가 끝나면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하는데, 우리는 “여자끼리의 술자리가 파했으니 가서 그의 술버릇을 알립시다”라고 하자고. 모르는 여자가 없게 하자고.


<출근길의 주문> 중에서, 이다혜




 책을 읽으며 문장 중에 ‘그의 술버릇을 알립시다’라고 나와있는 구절을 읽으며, 나는 이게 술버릇이 아니라, 술범죄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핑계로 버릇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술을 매개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거라고 생각 든다.


요즘 페이스북에 나에게 술범죄를 저지르려고 한 두 남자 중에 한 명이 계속 친구 추천으로 뜬다.


자세한 이야기는 1년 전쯤에 썼는데, 쓸 때는 그렇게 조마조마했는데 그 이후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마음이 그나마 좀 편안해진 거 그거 하나 있긴 하지만.


https://brunch.co.kr/@ddocbok2/38

https://brunch.co.kr/@ddocbok2/39


나는 위의 두 남자의 연락처가 모두 없는데 그들의 연락처 목록 중에 내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은 환경단체에서 아직 일을 하고 있다면 내가 환경단체 관련 페이지 중에 좋아요를 눌러놓은 게 많아서 연결고리가 있을 수 있고 한 사람은 같은 학교라는 연결고리가 있긴 하다.


어린 시절의 나 같으면 심장이 두근거려서 눈에 띄자마자 바로 차단을 박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성범죄 시도자인 그가 나를 친구 추가 하진 않을 것이고 물론 내 글도 보지는 않겠지만 그를 아는 사람이라도 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에게 이 여자가 쓴 게 진짜냐고 그에게 물어서 글들을 읽게 되고 그가 인생 좆됐구나 하고 느끼기를.


삶의 뿌리가 뒤흔들린다는 게 어떤 건지 생생하게 경험하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성적 수치심을 느끼기를.


정말이지 성적 수치심은 원래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느껴야 하는 건데. 그때 그가 못 느낀 걸 지금이라도 느껴야 하는데.


사실 인생이 원래 그렇듯, 내가 원하는 대로 흐를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 그냥 한번 끄적여봤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심한 말이 심한 행동을 막을 수 있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