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은 Sep 13. 2020

나도 내 이상형에 진지하다

전지현은 당연하고 셰익스피어는 이상해?

지금도 전지현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형이겠지만, 10년 전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형의 여자였다.


10년쯤 전, 내가 알던 어떤 남자도 자신의 이상형이 전지현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이상형이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그 당시 한창 셰익스피어에 빠져있을 때였고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내 남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셰익스피어가 내 이상형이라고 말했다. 그 남자애는 웃음을 터뜨렸다.


-셰익스피어? 그 작가?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듣고 굳이 작가, 냐고 되묻는 것부터 어이없었다. 셰익스피어라는 명사에 다른 직업군을 가진 유명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글 쓰는 여자가 셰익스피어가 이상형이라는 게 도대체 어느 부분이 웃음 포인트인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좀 더 구체적인 이유를 묻는 것이라면 모를까.


나는 웃음기 하나 없는 말투로 물었다. 왜 웃냐. 녀석이 웃다 말고 설명했다. 너 진짜 골 때린다,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이상형이 될 수가 있어? 심지어 그 사람, 죽은 사람이잖아.




이상형에 생사의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닌데 죽은 사람이라서 이상형에서 배제해야 한다니. 나도 전지현을 좋아하지만 그게 셰익스피어를 무시해도 된다는 뜻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상형이 셰익스피어라는 사실에 진지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이상형이 전지현이라는 사실에 나만큼 진지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예뻐서, 미디어에서 보이는 성격이 매력 있어서 이상형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매력의 요소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건  사람의 본질까지는 아니다. 어쩌면 그의 이상형은 지금쯤 수지나 다른 여자 연예인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이상형에 진지하다면 남의 이상형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진지할 수 있고 그렇다면 그렇게 웃을 일은 아니다.


나는 곧바로 그에게 네가 가진 생각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고정관념인 줄 아냐고 비웃고, 그가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끼친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구구절절 설명한 후, 또한 외모를 떠나 심지어 생사 여부까지 떠나 셰익스피어가 전지현보다 얼마나 대단하고 가치 있는 인물인지 설명해주고는 그와 연락을 끊었다.


그 녀석이 웃었던 건 단지 셰익스피어가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초상화가 매력적인 외모는 아닌 것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뭐가 됐건 누군가의 이상형을 어떻게 함부로 비웃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글 쓰는 사람이 이상형인 걸, 그게 심지어 셰익스피어인데 비웃음 당한 일은 한동안 계속 언짢았다. 그 남자가 무례한 것이라는 것도 알고, 셰익스피어가 누군가의 이상형으로서 무시받을 사람이 절대 아닌 걸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그 외에 하고 싶은 말 다 해주고 연락을 끊었는데도 한동안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


글 쓰는 남자 중에 다른 남자로 할 걸 그랬나. 윤동주나 백석으로. 잘생긴 데다 글 쓰는 사람이었고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까지 한 그들이었다면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함부로 비웃지는 못했을 텐데.


글 쓰는 남자가, 그것도 대중적으로도 사랑받고 문단의 평가 역시 생전, 사후 모두 최고인 평가를 받은 사람인데 이렇게 비웃음 당할 일이라면 글 쓰는 여자도 누군가의 이상형으로 언급되었을 때 비웃음거리가 될 확률이 높을까. 글 쓰는 여자 중에 괜찮고 매력 있는 사람 정말 많은데. 진짜로.



매거진의 이전글 상처 받고 좌절한 뮤즈가 되어야만 작가가 되는 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