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가 타인을 우선시하는 연인이라면
추석이 다가오니 제사 관련 에피소드들이 익명 게시판 여기저기에 올라온다. 특히 자기 부모님에게 착한 아들 노릇하느라 배우자 고생은 외면하는 남편들 이야기의 수가 많다.
예전에 만난 남자 친구 중에 자기 착한 척하려고 나를 무안하게 했던 천사병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아마 그 친구도 결혼했으면 추석에 배우자 고생은 방관하는 남편이 될 성향이 강하게 있었다. 꼭 그 이유 때문에 헤어진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저쨌든 이 친구와 결혼까지 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 권태기 왔을 때 헤어졌다.
그는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 친구가 100% 안 좋은 남편이 될 남자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착하긴 착했지만, 나에게 착한 것보다 남의 편에서 착한 사람 노릇 하는 걸 즐겼다.
그 친구와 있던 일 중에 나를 가장 화나게 했던 일은, 우리 문제도 아니고 제3자 때문에 싸웠던 일이었다. 우리 둘 중의 부모님이나 친구도 아니고, 이름도 나이도 모르고, 그 일이 있던 다음날부터 바로 얼굴도 기억 안 날 아주 완전한 타인.
그런 타인의 기분 때문에 싸웠던 그 날은 여름이었고, 그와 나는 데이트를 하러 지하철을 타고 혜화에 가는 길이었다. 지하철 안 혼잡함을 피해서 그와 나는 빈 노약자석 앞에 서 있었다. 우리는 노약자가 아니라서 앉을 생각이 없었고 누가 봐도 안 앉을 폼이었다.
어느 역에서 문이 열리고 한 아주머니가 빈자리인 노약자석을 발견하고는, 다른 사람들보다 잽싸게 앉기 위해 나를 밀치고 샌들 신은 내 발을 밟고 그 자리에 앉았다. 누가 봐도 좀 심하게 밀었다.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내 손을 빨리 앉으려고 말도 없이 쳐내고 발도 밟을 정도였으니까. 치워달라고 하면 될 손을 밀친 것도, 그녀가 급하게 앉느라 내 발이 밟힌 것, 둘 다 기분 나쁘고 또 아팠다.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나왔다. 피가 난 건 아니었지만, 많이는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눈에 보일 만큼 살이 까졌다. 아주머니는 그걸 보고도 어째, 어째 하면서도 사과는 없었고, 나는 그 부분 때문에 2차로 불쾌했다.
‘어째, 어째’가 아닌 제대로 된 사과를 바랐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아주머니, 지금 제 발 밟으신 거 아주머니도 아시죠? 사과하세요.’라고 몰아세울 생각은 없었다. 나의 엄마도 내 또래 젊은 여자에게 그런 무례를 범할 때가 종종 있었고, 사과를 하지 않는 걸 본 적이 몇 번 있었다. 내가 엄마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하라고 소심하게 권하면 엄마는 내가 뭘, 이라며 그녀들에게 결코 사과하지 않았다. 그 여자들이 느꼈을 불쾌함을 이해하는 내가 엄마 대신 사과를 했다.
그래서 엄마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이 분에게, 정말 앉고 싶으실 정도로 피곤한 일이 있겠지, 애써 분노를 다스리고 있었다. 사과를 하지 않는 게 그게 그분들 나이 대의 성향일지도 몰라, 젊은 우리보다 힘든 시기를 살아오신 분들이다, 참자, 그냥 가자, 하며 여러 각도로 노력하며 분노를 애써 조절하고 있는데 남자 친구가 물었다.
-괜찮아?
나는 그가 내 편을 들어주려는 줄 알았다. 내가 스스로 말하기엔 차마 민망해서 요구하지 못한 사과를 그가 아주머니에게 대신 받아주려는 건 줄 알았다.
‘아주머니, 사람 발을 밟으셨으면 아무리 실수셨더라도 사과를 하셔야죠, 이 친구 발 까진 거 안 보이세요’ 뭐 이런 식으로.
그래서 기다렸다는 듯이 평소에는 컨디션에 따라 있다 없다 하는 애교까지 섞어서 고자질 아닌 고자질을 했다.
-아니. 안 괜찮아. 저 아줌마가 밟아서 발가락 까졌거든. 보이지?
그러자 아줌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천사병을 앓고 있던 그놈이 던진 말이 가관이었다.
-야. 왜 그래. 아주머니 무안하시게.
어이가 없어서 내 말투에 애교가 싹 가셨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어?
-니가 먼저 괜찮냐고 물어본 거면, 니가 생각해도 뭐가
됐든 ‘별로 안 괜찮은 게 있어보이니까’ 물어본 거 아니야? 저 아줌마가 내 발 밟은 거, 나 불쾌해. 근데 나이 든 분한테 굳이 따져서 사과받을 생각 없어서 안 따졌어. 그래도 안 괜찮은 건 안 괜찮은 건데, 내가 안 괜찮은 거 안 괜찮다고 말도 못 해? 그리고 이거 니가 물어봐서 얘기한 거잖아. 너 말하는 거 보니까 내가 진짜 괜찮은 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여기서 ‘아니야~ 괜찮아.’ 이런 착한 여자 친구 코스프레해달라고 질문한 거네. 답 정해놓고. 나 그런 사람 아닌데?
크게 말하진 않았지만 내가 다다다다 말하니 몇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고 그 친구는 그것도 또 창피했나 보다. 아줌마는 아예 못 들은 척하기로 마음먹은 듯 고개를 숙이고 가방에서 뭔가를 찾는 척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녀의 사과는 받으면 기분이 풀리고 좋겠지만 안 받아도 그만이었다. 남이니까.
내 남자 친구라는 존재에게는 내 고통보다, 내가 착해 보여야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게 불쾌했다.
내가 지금 아픈데(크게 아픈 건 아니지만) 이 와중에 왜 착한 여자인 척을 강요하지? 착한 사람인 척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자기가 발 밟혔을 때 그때 괜찮습니다, 하던가. 하지만 지금 발을 밟힌 건 그가 아니라 나였다.
-야, 아줌마 들으시겠다. 불편하시게.
-제3자한테는 신경 끄시고요, 오늘 데이트는 너 혼자 하세요.
나는 그 말 끝에 작게 욕을 하며 그 길로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왔고, 물론 그 친구가 이름을 부르며 쫓아왔지만 여기서 붙잡으면 진짜 끝이라고 말하고 나 혼자 그대로 집으로 왔다. 그 날 하루인가 이틀인가 연락하지 않았다. 이후 그 친구가 조심하겠다고 잘못했다고 해서 화해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 일은 이 친구가 정 떨어지는 이유에 큰 기여를 했다. 나는 저 일에 대한 분이 한동안 풀리지 않았다. 분명 일 자체는 별 일이 아니었지만 그 친구의 태도는 별 게 아니라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한 4-5개월 뒤에 권태기 왔을 때 이때 생각이 많이 나서 미련 없이 헤어졌다. 그냥 저날 진짜 끝이라고 말하면서 바로 헤어질 걸. 착하긴 착하니까 하면서, 몇 번 저런 상황을 봐주고 말았다.
나쁜 남자도 피곤하지만 천사병도 피곤하다. 자기 사람 안 챙기고 타인을 우선시하는 사람이 연인이라면 나도 그에게서 연인 말고 타인이 되는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