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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Jan 16. 2021

언니 얘기, 글로 써도 돼요?

희망고문이 나을까 희망없음이 나을까

한동안 나는, 술만 마시면 엄마에 대한 설움을 털어놓을 때가 있었다.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독립을 한 후에, 의도하진 않았지만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수많은 증거들을 깨닫고 말았던 것이다.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증거였다.


엄마와 함께 살 땐, 엄마가 안쓰럽고, 우리 집 경제 상황이 어려워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까칠한 성격일 뿐, 나를 미워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독립해서 살아보니, 타향인 서울에서 만난 낯선 이들이 나의 엄마보다는 친절했다. 그 친절에 다른 계산적인 이유가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엄마의 사랑을 의심할 만한 사건은 많았다. 외면하고 싶어서 의심을 밀어냈을 뿐이었다. 내가 사랑받지 못한 자식임을 스스로 인정하기 싫었으니까. 내가 아주 어릴 때, 엄마는 돈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나를 속이고 나만 집에 혼자 놔두고 동생만 데리고 4시간 거리의 외갓집을 다녀와서 밤새도록 혼자 있었던 일, 그때 동네 아저씨한테 성추행당했던 일, 감기 같은 걸로 아프게 되면 나가서 아프지, 왜 끙끙 앓아서 사람 불편하게 만드냐는 가시 돋친 말투로 돈 줄 테니 빨리 병원에 가라고 했던 아팠던 순간들, 예능을 보면서 웃으면 웃음소리가 듣기 싫다, 슬픈 드라마를 보다가 울면 우는 게 꼴 보기 싫다, 밥 먹으면 넌 왜 매일 밥을 먹냐는 질문 등의 에피소드.


학대나 폭력은 없었지만, 엄마는 감정조절을 하지 못하고 종종 나를 혐오하는 듯 느끼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했고, 그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는 나에게 쌍욕을 했다. 거기서 더 사과를 요구하면 쌍욕에 더해진 더욱 심한 말. 그리고 그렇게 관계가 얼어붙으면, 냉랭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어한 내가, 항상 내가 사과를 함으로써 관계를 회복시켰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집안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가끔 드라마의 웃긴 장면을 따라 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어 집안에 활기를 불어넣는 사람은 집에서 나 하나였다. 나는 그렇게 밝은 성격이 아닌데도, 집안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내 영혼을 갈아 넣어 가며 살았다. 거실에서 그렇게 가족을 웃게 만들고, 내 방으로 들어오면 나는 뭔가 공허했다.


독립하고 나서 엄마와 연락을 주고받을 때마다 내가 들어야 했던 말은 '나 때문에 집안 분위기 다 망쳤다.'는 비난이었다. 내가 집에 있을 땐 그나마 내가 가족들한테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괜찮았는데 니가 글 쓰겠답시고 나가버리니까 엄마랑 아빠도 딱히 대화할 게 없고, 동생도 엄마와 말할 일 없으니까 집이 얼마나 삭막해졌는지 아냐고 이게 다 '나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응원까지 바라지는 않았어도 비난받을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고, 당시엔 저 말만큼 외롭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 같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은 내 착각일 뿐, 그녀는 계속해서 나를 무너지게 할 수 있는 수많은 말을 창조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뱉은 후엔 기억도 잘하지 못했다. 엄마가 까먹을까 봐 그 자리에서 바로 얘기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폭언이 날아왔고, 바로 얘기하지 않고 기억했다가 나중에, 서운했다는 걸 얘기하면 별 걸 다 기억하는 예민한 아이가 되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그리고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나를 낳았고, 나를 때리지 않았고, 굶기지 않았고, 심지어 버리지도 않고 대학까지 보내서 키웠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이걸 참 많이 강조했다.


그게 나를 힘들게 했다. 어쨌든 누군가를 낳고 양육하고 교육시킨다는 게 가벼운 일은 아니니까, 인생을 갈아 넣어야 할 수 있는 일인 건 맞으니까, 나는 그녀를 미워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엄마에게 배려를 하면 할수록, 엄마에게 다정하게 굴면 굴수록, 나는 고갈되는 기분이었고 무엇보다 비참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엄마인 그녀를 외면하기도 불가능했다. 간혹, 엄마도 나에게 다정할 때가 아주 없지는 않았으니까. 1-2년에 한두 번 정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간혹 다정할 때도 있었다. 몇 시간도 못 가는 다정함이라도 그녀의 다정함을 느낄 수 있을 때면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았다. 흔히 은유적으로 말하는 심장이라도 떼줄 수 있다는 감정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을 정도로, 달콤하고, 따뜻하고, 너무 좋았다. 그래서 아무리 변덕스럽고 간헐적으로 보이는 애정이라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변덕스러운 사랑이라도 원하면서, 엄마의 폭언과 가시 돋친 말들은 또 계속 생각났다. 아무렇지 않은 듯 살면서도 술만 마시면 서운함이 심연 위로 올라왔고, 그녀의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결코 영원히 받을 수 없는 그녀의 사과가, 너무나 간절했다. 하지만 사과를 요구하면 나는 또 예민하다고 비난을 받거나 욕을 먹을 것이었으므로 나는 그 마음을 눌러야 했다. 관계를 망가뜨리기 싫으니까.


그런 마음을, 주로 격주로 있던 시나리오 수업의 저녁 술자리에서 봉인 해제하곤 했다. 앞에 있는 사람이 친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처음엔 엄청 고민스럽고 머뭇거려졌다. 서른이 넘어서 ‘마마걸 마냥’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그러면서도 밉다는 이런 넋두리를 해도 되나 싶었지만 원래 처음이 힘들지 두 번째는 일도 아니다. 나중엔 어차피 내가 누군지 술 먹으면서 무슨 얘기 했는지 기억 못 할 거라고 스스로 합리화시키면서 내 넋두리에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 쉬는 시간에 바람을 쐬러 나왔는데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언니가 술 먹고 하는 얘기, 엄살인 거 알죠?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비록 허구의 이야기를 만든다고는 하나, 쓰는 사람의 개인적 서사나 경험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가장 강렬한 주제인 이야기가, 주로 시나리오의 주제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에게 말을 건 그 여자애는 수업 초반에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엄마가 외할머니에게 자신을 맡기고 떠났는데 자신이 밥벌이를 하게 될 때까지, 한 번도 연락이나 보러 온 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20대 중반부터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 괜찮아진 걸 외할머니를 통해 알게 된 엄마는 주로 생활비를 달라고 하기 위해 그녀에게 연락을 한다고 했다.


그런 그 애가 살아온 인생에 비하면, 그래, 어쩌면 엄살이겠지.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기분이 확 상했다. 아무 대꾸도 없이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 여자애가 내 팔을 잡았다. 아니, 그런 식으로 말하려던 건 아니라고, 자신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달라고 했지만 나는 그 팔을 떼어냈다. 그걸 왜 굳이 나한테 말하려고 하냐고, 그냥 아무한테나 말하라고 내뱉듯이 말하고는 들어갔다.





얼마 후, 시나리오 수업 후 술자리에서 그녀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 아마 이날은 그녀가 한 말 때문에 '엄마 애정에 대한 넋두리'를 하지 않고 조용히 술만 마셨던 것 같다.


-언니 얘기, 글로 써도 돼요?


나는 좀 놀랐다. 상관은 없었다. 작가가 꼭 자기가 겪은 이야기만 쓰라는 법도 없고, 내가 창작한 소재를 동일하게 쓰겠다는 것도 아닌데 괜찮다고 했다. 무엇보다 어차피 내 이야기는 내가 제일 잘 쓸 수 있으니까, 디테일에 있어서도 내가 제일 잘 묘사할 수 있을 테니 남이 아무리 기를 써도 나만큼 못 쓸 테니까 남이 아무리 써도 상관없었다. 게다가 엄마와 딸의 갈등 스토리는 드문 이야깃거리도 아니다. 아니, 사실 좀 흔하다.  


하지만 의아했다. 내 인생보다는 그녀의 인생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 소재로서는 더 드라마틱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나에게는 '내 인생'이라는 소재가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흔히 정상 가족이라고 일컫는 부모형제(남매, 혹은 자매)의 4인 구성 속 인물의 이야기는,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할머니가 혼자 키우며 겪었을 우여곡절 속의 삶에 비하면 사실 비교가 되지 않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물었다. 왜 니 이야기 안 쓰고 내 이야기 쓰려는 거냐고. 사실 그녀와 이야기를 하기 싫다고 한 데에는 그녀의 말이 일정 부분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 같은 학년 아이 중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고 있는, 얼굴 예쁘고 공부 잘하고 똑 부러진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사는 이유가  부모님이 이혼해서라는 걸 알게 된 아이들은, 그 아이 얘기를 할 때 가끔 ‘쟤, 엄마 아빠가 버리고 간 거래’라는 식의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아마 나에게 엄살이라고 했던 아이도, 저런 악의 없고 시답잖고 상처되는 말들을 직, 간접적으로 들으며 성장했을 것이고 그 상처의 크기는, 경험해 보지 못한 내가 감히 짐작할 수 있는 종류의 고통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녀의 상처와 고통이 더 크다고 해서, 내가 겪은 고통이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어떤 정신과 상담의가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내가 총을 한 두 발 맞고 쓰러졌는데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총을 여러 발 맞고 다쳤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다쳤다고 해서 내가 안 아픈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한 두발 맞은 나보고 너는 나보다 덜 다쳤다고 언급하는 것도 사실은 무례한 일이라고. 서로의 고통은 경쟁시키고 서열화시켜도 되는 대상이 아니고 둘 다 아픈 거고, 각자 심한 상태니까 각자 치료를 받고, 각자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게 먼저라고.


심리상담에는 꽤 큰돈이 들어서 위 내용은 직접 상담을 받은 것은 아니고, 책인지 블로그에서인지 읽었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혹은 비참할 때마다 심리학 서적을 찾았다. 아니면 술자리를 빌어 찔찔 넋두리를 하거나.  


꽤 오래전 일이라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녀가, 내 이야기를 정말 글로 썼는지는 모르겠다. 왜 내 이야기를 쓰고 싶은 거냐고 묻는 내 질문에 그녀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솔직히, 제가 제일 불쌍한 것 같았거든요. 근데 언니가 하는 얘기 자꾸 듣다 보니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냥 그렇더라고요. 언니처럼, 엄마가 언젠가는 사랑해줄 거라고 엄마한테 희망 고문당하는 것보다는 어쩌면 저처럼 엄마가 깔끔하게 버리고 가서 엄마 노릇 1도 안 해서 희망 없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저 언니보다 내 인생이 덜 고통스러운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언니 얘기를 쓰고 싶은 것 같아요. 다행히 저 키워주신 외할머니한테서 넘칠 만큼 사랑받았거든요.


무슨 얘기 끝에 서로의 생일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녀의 생일이 1월 16일이었고, 내 생일은 2월 16일이었다. 그녀가 내 이야기를 쓴다고 했는데 내가 그녀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녀의 생일에. 그녀가 내 이야기를 썼는지, 혹은 글로 밥벌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그녀 덕분에 엄살을 줄이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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