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악마
요새 연일 유명인의 학교 폭력에 대한 고발이 끊이지 않고 있다.
누구의 학폭은 증거가 끊임없이 나오니 맞는 것 같고, 누구의 학폭은 증거가 별로 없으니 허위사실 유포인 것 같다 그런 판단을 할 생각은 없다. 사실 그런 판단을 내릴 자격이 있는 게, 정확히 누군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어릴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 내 짝은 유난히 2차 성징이 빨리 왔다. 한마디로 가슴이 컸다. 그때는 사이즈도 잘 모를 때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이즈 표 기준으로 E컵-F컵 정도 되는 것 같다. 이 정도면 어떤 헐렁한 옷을 입어도 가려지지 않는다. 그 친구의 큰 가슴도 어쩔 수 없이 티가 났다.
그리고, 꼭 그 친구의 가슴을 치고 도망가는 남자애가 한 명 있었다. 내 짝이 분해서 쫓아가서 팔이나 등 같은 곳을 후려치면 그때부턴 도망을 멈추고 지가 더 화난 것처럼 가슴을 퍽퍽 퍽퍽 때렸다. 여자아이의 가슴을, 니가 먼저 때렸다는 핑계를 대면서. 남자애가 먼저 슬쩍 사람들 눈에 티 안 나게 툭 때리고 도망간 거였다. 그래놓고 티가 나는 폭력, 을 여자애가 사람들 보는 앞에서 휘두르게 만들고, 니가 먼저 때렸다며 가슴을 마구 때렸다. 영악하게.
우리 반은 40명이 넘는 숫자였는데 그 성추행범의 싹이 다분한 남자아이는, 나는 별로 괴롭히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뿐만 아니라 그 아이는 우리 반 40명 모두 별로 괴롭히지 않았다. 내 짝만 심하게 괴롭혔다.
잔잔한 장난, 특이한 이름이나 어떤 옷을 갖고 놀리는 장난 정도는 누구에게나 했지만 불쾌한 신체 접촉을 동반한 장난은, 딱 한 명 내 짝에게만 했다. 그 아이가 선택한, 가장 만만한 손쉬운 먹잇감이었던 것이다. 대부분 그 아이에게 묵인할 만한 장난은 당했어도 그냥 한 번 찡그리고 말 정도였다. 가끔 남자애들과 종종 다투기도 했지만(그 아이가 싸움 중에 흠씬 두들겨 맞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누구도 학교폭력이라고 할 만한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 그녀 말고는.
일진도 아니었고 다른 아이들과 무리 지어 다닌 적도 없지만 성추행범의 싹이 보였던 그 아이는 그 외에도 푼돈을 참 자주 빌렸다. 나한테만 빌린 건지, 여러 아이한테 빌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준비물을 안 가져왔다, 내일 꼭 갚겠다 하며 300원, 500원, 1000원씩 빌려가서 안 갚았다. 상냥하게 삥을 뜯고 있는 건데 나 혼자 빌려주고 있다고 믿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삥이나 뜯기는 아이인 것으로, 스스로를 나약하게 기억하기 싫어서 정신 승리하려고 이러는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나는 돈 갚으라고 엄청, 지겹도록 닦달을 했고,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나에게 돈을 빌리지 않기는 했다.
어쨌든 끝난 일은 아니니 빌린 돈 갚으라고 말하면 표면적으로 하는 말일지 몰라도, 그때마다 미안하다고 하기는 했다.
내가 닦달했다고 공격을 하거나 때리거나 위협적으로 군 적은 없었으니 일진으로 분류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어쨌거나 빌린 돈을 갚은 적은 없었다. 하교할 때 보면 지 돈으로 사 먹는 건지 얻어먹는 건지 군것질을 하고 있는 걸 종종 보아서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다음 날 또 달달 볶으면 그 아이는 풀이 죽는 모습을 보였고(혼신의 연기였을까..?) 그러면 또 나는 내가 너무 달달 볶는가 싶은 마음은 들었지만 그래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을 닦달했다.
어쨌든 나는 돈을 빌려준 입장이고(모르겠다, 삥 뜯기고 정신 승리하는 걸까) 돈 갚으라고 하며 그리고, 내 짝 괴롭히지 좀 마! 이런 말도 함께 할 수 있어서 뭔가 내가 돈을 빌려준 입장인 것이 뿌듯하고 그런 말을 할 때면 스스로가 정의로운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반장도 아니고 공부도 특출 나게 잘하는 것도 아닌, 아무 영향력도 없는 내가 이래라저래라 한다고 해서 내 말을 들을 아이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나도 얼마 안 가 알게 되었다. 내 앞에서 듣는 시늉만 하는 거였다. 다만 나로서는 괴롭힘 당하고 있는 짝을 위해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그게 다라서, 그거라도 했다. 그러다 어떤 날은 가끔 그가 괴롭히는 타깃이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비록 공격적으로 나를 대한 적은 없었지만 돌변해서 싸울 일이 생기면 내가 질 것 같았고, 아무도 내 편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아서 싸움까지 갈 일은 안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한 번도 갚은 적 없이 그가 빌려간 돈은 졸업할 때쯤 몇천 원쯤 되어있었다. 나는 졸업과 함께 그 돈을 포기했다.
나는 이 남자애가 TV에 나온다고 해도 나에게 학교폭력을 가한 가해자로 생각되진 않을 것이다. 쟤가...? 하고 의아해하는 데서 그칠 것이고, 그 프로그램이 재미있다면 딱히 TV를 돌리거나 할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1년 내내 ‘가슴 펀치’를 당한 내 짝도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아닐 거라고 본다. 이건 그때나 지금이나 성추행이었다. 선생님에게 안 이른 것도 아니었지만 처음에는 따끔히 혼내시던 선생님도 여러 업무에 지치셨는지 한 달쯤 지나자 ‘ㅇㅇ이가 철이 없어서 그래’, ‘시간 지나면 안 할 거야’ ‘좀만 피해 다녀라’, ‘그냥 너도 같이 싸워라’ 정도로 타일렀다고 짝한테 들었다. 어쨌든 그녀보고 직접 해결하라고 한 것이다. 보호자인 어른들이 해결해준 게 아니라. 해결이 되었겠는가? 당연히 안 되었다. 졸업하고 나서야 그 상황은 끝났다. 그녀에게 트라우마를 남겼을 것이다, 아마도.
영화나 드라마 속에선, 주로 여주인공, 가끔 여주인공이 아니더라도 간혹 정의로운 남자애 혹은 성숙한 어른이 그런 행동을 막아주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는 곳은 판타지 없는 현실 세계다.
구해주는 멋진 반 친구도 없도, 돌이켜 봤을 때 감사하고 그래서 찾아뵙고 싶거나 존경할 만한 어른도 없다.
자기 앞가림하느라 바쁜 교사, 즐기는 가해자, 버텨내는 피해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친구가 있을 뿐이다.
우리 반 아이들 모두가, 그녀가 이렇게 매일 꾸준히 성추행당한 것을 알고 있을까?
어쩌면 우리 반 내에서도 또 다른 폭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모르는 또 새로운 일일 것이다. 나는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아이였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성격도 아니라서 딱 내 생활 반경 거기까지밖에 인지할 수가 없어서 내가 모르는 일도 꽤 많을 것이다. 내가 그녀의 피해를 잘 알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다. 바로 옆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정의롭거나 주변을 잘 보살피는 성격이어서가 아니었다.
이런 나까지 옆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간접 경험을 겪을 수 있을 정도로 학교폭력은 흔하디 흔하다. 스케일과 디테일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방관자였던 게 미안하지만,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어떤 방법을 썼어야 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도 그걸 모르겠어서... 참 미안하다.
폭력이란 게 그렇다. 세상에 다 드러나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구석에 숨어있다.
나한테 잘못을 한 아이가 아니었다고 해도, 내가 아는데 그냥 장난기 많은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그 사람이 그럴 리 없다고, 대다수를 향해 나쁜 아이가 아니라고 가해자 ‘대신’ 말하면 안 되는 이유다.
이미 피해자는 유명인보다 열악한 위치에서 싸우는 싸움이다. 법적인 도움, 경제적 능력, 이런 부분이 유명인보다 열악한 걸 알면서도 싸워보려고 하는 거다.
가해자가 직접 말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가해자가 직접 말해야 비록 두 사람의 기억이 완벽히 같지 않을지라도 둘만 아는 진실의 조각이 나올 수가 있다. 그 접점을 들여다보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에게는 평범한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독히 나쁜 놈이었을 수 있다는 걸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