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거지같이 배웠단다, 참고 인내하고 남자 뒷바라지나 하라고.
몇 년 전, 친구 소개로 4살 어린 남자를 소개받은 적이 있다.
그 친구가 나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말에 일단 만나는 자리에 나가긴 했는데 그때 내 나이가 서른이었고 소개받은 그 친구는 26살이었다. 20대 때 연애를 너무 안 했던 게 나도 모르게 억울해서였는지 29살부터 너무 닥치는 대로 만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른인 내가 20대 남자를 만나는 게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외모만 봐서는 딱히 연하라고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20대는 20대 만나게 해 줘야지, 이런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렇게 생각은 했으나 딱히 만날 사람도 없고, 글 쓰는 거 말고는 남는 시간에 할 게 없으니 몇 번 술자리를 가졌다. 그러다가 이야기 도중 그의 여동생이 연애를 오래 해서 곧 결혼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물론 그가 나에게 뭘 물어본 것은 없었으나 그의 여동생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무슨 언질인 줄 알고 나도 모르게 나는 사실 작가가 꼭 되고 싶은 게 커서 작가로 내 생계를 책임질 만한 상황이 되기 전까진 결혼 생각이 별로 없고, 아이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아이를 웬만하면 안 낳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우다다다 하게 되었다. 낳더라도 나이 먹고 경제적으로 아주아주 풍족해졌을 때 낳거나, 풍족해지지 않으면 안 낳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얘기까지 하고 싶었는데 차마 그 얘기까지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했나? 안 했던 것 같다.
어리든 말든 그 친구의 외모가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살짝 못 미치긴 했으나 어쨌든 호감이 아주 없지는 않았고 그냥 남사친, 여사친 이런 게 아닌, 이성교제를 목적으로 하는 데이트 비슷한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미안했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면 연애하다가 결혼을 생각하고 결혼 이후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게 보편적인 마음일 텐데 싶어서 이제 연락도 하지 말고, 오늘 자리를 끝으로 이제 만나지 말아야지, 싶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누나, 저는 나중에 결혼은 하고 싶긴 하거든요. 아침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 누워있고, 그 사람과 함께 눈 뜨는 거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저도 아이는 안 가졌으면 좋겠어요. 저도 하고 싶은 거 많거든요. 그리고 누나는 작가가 꼭 되고 싶다면서요. 애 낳고 글을 어떻게 집중해서 써요. 저는 아이를 원하진 않지만 제 여자가 낳고 싶다고 하면, 힘들겠지만 정말 최선을 다해 양육 분담할 생각이 있어요. 그래도 낳는 것보단 안 낳는 게 더 행복할 것 같고요. 그런데 누나, 육아랑 글 쓰는 둘 다 하면 글 쓰기가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옆에서 당장 아이가 울고 있는데 글이 집중해서 잘 써질 수는 없잖아요. 물론 아이 낳고 글도 쓰고, 둘 다 잘할 수도 있죠. 누나가 못 그럴 거 같다는 게 아니고, 뭐가 됐든 둘 다 한다는 건 어렵잖아요. 그러니까 뭐 아이를 안 낳고 싶어서 결혼이 하기 싫다,인 거면 마음 좀 편하게 가져도 돼요. 꿈이 먼저라면서요. 그럼 임신이고 출산이고 다 하지 마세요. 누나 몸은 누나 거고, 누나 인생은 누나 거잖아요.
뭐랄까, 외모 때문에 조금 낮았던 미지근한 마음의 온도가 갑자기 확 올라갔다. 도대체 이 남자는 어디서 이렇게 잘 배웠을까. 무슨 책을 읽어서 이렇게 고맙고 훌륭하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너, 어디서 그런 생각을 배웠어? 책에서 읽었어?
그러자 그 친구가 부끄러운 듯 대답했다.
-저... 사실 책 별로 안 읽어요. 그냥 저 클 때 학교에서나 주변에서 다 이렇게 듣고 이렇게 배운 거 같은데... 그럼 누나는 어떻게 배웠는데요? 제가 아는 거랑 달라요?
요즘 애들은 제대로 잘 배우는구나. 사실 우리 땐 그렇게 못 배웠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