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운명의 모양
우리는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운명의 운명' 같은 옛날이야기가 있다. 사실 단편소설 도입부로 쓰고 싶어서 썼던 것인데 처음 시작은 작가가 되지 못한, 작가 지망생들의 술자리 대화에서 시작한다.
-야, 얘한테 그 얘기해줘.
-무슨 얘기?
-너네 할머니가 해줬다던, 호랑이 먹이 될 팔자였던 여자애 얘기 있잖아. 니가 20살 때 해줬던.
-그 얘기? 갑자기 왜?
-듣고 싶기도 하고, 태영이 얘는 아직 그 얘기 못 들었으니까.
-태영이 너한테는 내가 그 얘기 해준 적 없나?
-응. 처음 듣는 얘긴데?
-그렇단 말이지. 옛날 옛적에….
어느 부잣집에 여자아이가 한 명 태어났어. 그런데 그 마을의 점쟁이가 아이의 사주가 호구 팔자, 그러니까 15세가 되는 날 호랑이의 밥이 될 팔자로 태어났다는 거야. 이 점쟁이의 점괘는 좋은 점괘든 안 좋은 점괘든 지금껏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을 정도로 매우 용한 점쟁이였어.
당연히 집 안 분위기는 초상집이 되었지만 그것도 몇 년이 지나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평온을 되찾았지.
다들 그 사실을 잊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15세가 되면 이 아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구나, 하는 생각이 모든 집안사람들의 생각이었어.
그런데 말이야, 이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게 익숙해지거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점괘가 아니었어. 15세가 되면 죽는다니, 그것도 호랑이 밥이 돼서 죽는다니,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싶은 거지. 남들 다 하는 혼례 역시 꿈도 못 꾸고 말이야.
14세가 되자 가족들이 더 잘해주기 시작해. 곧 죽을 아이니까 옷도, 음식도, 물건도 아낌없이 사주는 거야.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살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데 아무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 자신에게 호구 팔자 점괘를 준 망할 점쟁이는 이미 죽고 없어서 혹시나 그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볼 곳도 한 군데도 없었지. 소녀는 밤마다 잠을 이룰 수 없어서 잠을 뒤척이곤 했어.
15세가 되기 이틀 전 결국 소녀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앉아서 호랑이 밥이 될 순 없다고 말하고는 호랑이를 찾아가겠다고 말했어. 그 망할 호랑이를 죽일 수 있으면 죽이고 살아야겠고, 그게 안 돼서 내가 진짜 죽어야 할 팔자면, 왜 내가 죽어야 하는지 이유라도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이렇게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고 말이야. 가족들은 만류했지만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추위와 배고픔을 해결할 옷과 음식을 준비해 호랑이가 산다고 알려진 산속으로 들어갔어.
하지만 호랑이를 찾는 건 쉽지 않았지. 원래 입고 나섰던 비단옷은 흙과 먼지에 꼬질꼬질해졌고 준비해 간 옷도 찢어지고 헤져서 추위를 막기엔 아주 역부족이었지. 소녀의 고왔던 얼굴도 햇볕에 타고 먼지를 닦지 못해 지저분해졌어. 준비해 간 음식도 다 먹었고, 이제 소녀는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어. 그런데 어딘가에서 낮은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어. 소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갔지. 그러자 동굴 안쪽에 집채만 한 호랑이가, 동굴 밖을 나가려고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었어.
소녀는 호랑이를 죽이기 위해 칼도, 그리고 활도 준비해 갔었지만 싸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어. 호랑이는 웬만한 무기로 죽일 수 있는 정도의 호랑이가 아닌, 그야말로 엄청난 크기의 호랑이였어.
소녀는 겁이 나서 부들부들 떨면서도 호랑이에게 말을 걸었지. 15년 전에 너의 밥이 될 아이가 태어났다는 걸 혹시 아느냐,라고 말이야. 그러자 그 집채만 한 호랑이가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어. 소녀는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바로 내가 너의 먹이가 될 그 아이다, 하지만 하필 왜 내가 너의 먹이가 되어야 하는지 알고 싶어 찾아왔으니 이유나 알려주고 잡아먹어라,라고 말했어.
그러자 호랑이가 동굴이 울릴 정도로 코웃음을 치며 말했어.
-너는 내가 잡아먹을 아이가 아니다.
소녀가 믿을 수 없어 물었다.
-왜?
그러자 호랑이는 이미 바람처럼 달려 나가면서 말했다.
-내가 오늘 잡아먹을 아이는 OO 마을, O진사네 딸로, 그동안 누리고 싶은 거 누리고, 먹고 싶은 거 잘 먹어서 살이 하얗고 통통하게 오른 먹음직스러운 아이이기 때문이지. 꼬질꼬질 거지 같은 너를 그 아이인 것처럼 속이려는 모양인데, 나한테는 안 통해.
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고, 그렇게 해서 호구가 될 팔자였던 소녀는 호랑이의 밥이 되지 않았대.
-이게 끝이야.
-그게 끝?
-응. 이게 끝. 그 이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지 몰라. 태어날 때부터 15세가 되면, 호랑이에게 잡아먹힌다는 점괘는 벗어났지만 그 소녀가 그 이후 행복하게 살았는지는 아무도 몰라. 행복하게 살았을 수도 있을 거고, 불행해졌을 수도 있지. 호랑이도 마찬가지. OO 마을로 내려가서 그냥 에라 모르겠다, 다른 누굴 잡아먹었을 수도 있고, 자기 호구를 못 찾아서 지랄 발광을 했지만 결국 운명인 아이를 못 찾아서 아무도 못 잡아먹었을 수도 있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는 없어.
내가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머릿속에만 담고 있었지만, 또 너무 오래돼서 정말 내가 만든 이야기인지, 누가 들려준 이야기인지, 아니면 내가 만든 이야기에 누군가에게 들을 이야기를 섞은 것인지 모를 운명에 대한 옛날이야기이다.
그냥 내가 생각하는 운명이 이런 모양이다. 예정된 나쁜 운명을 피한다고 엄청난 행복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지만, 피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눈 똑바로 뜨고 마주하고 어떻게든 돌파해 보려고 한다면 '그 예정되어 있던 원치 않는 상황'은 비켜갈 수 있을 것이고, 그 비켜감은 다시 수많은 기회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회의 얼굴은 복불복이라서 괜찮은 기회일 수도, 별 볼 일 없는 기회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물론 어떤 기회의 결말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그런 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