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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Mar 26. 2021

저는 그렇게는 못 해요

나도 모르게 내 자궁 값에 계산기를 두드리고 말았다

삶의 기본값은 사람마다 다르다.


10대와 20대 중반까지 초중고, 대학교를 나와서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알콩달콩 혹은 아등바등 살아가는 게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루트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저 삶의 루트보다는 작가가 되는 삶을, 글 써서 먹고 사는 삶을 원했다. 20 중반부터 그 일을 갖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의 시간도  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글을 써서 돈을 버는, 그런 작가가 되지는  했지만.


그래도 작가가 되기 위해 몸부림친 시간이 아깝지는 않다. 덕분에 생각보다 의외의 만남에서 격려도 많이 받았다.


29살에 작가가 되겠다고 서울에 올라가겠다고 했을 , 염려와 응원의 비율은 9:1이었지만 역시 올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모아서 얼른 결혼도 하고 더 늦게 전에 아이도 낳아야 하지 않느냐고 했지만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의 말에  기울이지 않고 서울에 올라온 덕분에 아래에  글에 나온 것과 같은, 제대로 배운 남자도 만나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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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저 글 속의 친구와는 잘 되지 않았다. 저 술자리 이후 친밀감이 높아져서 대화의 분위기도 엄청 좋아졌고 우리는 선 넘지 않는 선에서 야한 얘기도 주고받았는데 그러다 저 친구의 말실수가 내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그 친구가 곧바로 사과를 했으나 아무래도 기분이 풀리지 않아서 사귀고 싶지가 않았다. 시간을 갖자고 했으나 아무래도 호감이 살아날 것 같지 않아서, 결국 만나지 말자는 쪽으로 정리가 되었다.






저 일이 있고 몇 주 지나지 않아 오랜 친구를 만나기 위해 그 친구가 살고 있던 지방에 갔다가 친구 이모가 하는 가게에서 술을 먹게 되었다.


그곳에서 내 친구와도 안면이 있고, 이모의 단골이라는 어떤 남자와 인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친절한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술자리에서만큼은 리액션이 좋은 편이다. 게다가  친구가 리액션이 별로 없다 보니 분위기가 쳐지게 하기 싫어서 리액션을  열심히 했는데 그게 자기한테 친절하게 하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남자가 혹시 남자 친구가 없으면 자신과 만나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없긴 하지만 나보다 14살이나 많은 남자와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나이도 나이지만, 외모도 내 기준의 마지노선에 못 미쳤다.


어른에 대한, 친구 지인에 대한, 친구 이모 단골에 대한 예의로, 하는 말에 열심히 맞장구를 쳐드린 것뿐이었다. 어차피 서울 올라가면 다시는 만날 일이 없지만 단념하시라는 의미로 나는 위의 글에서 했던 말을 이 남자에게도 그대로 읊었다. 어린 친구한테 할 때는 미안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니까 확실히 미안하지도 않았다. 어딜 감히, 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 제가 작가가 꿈이라서 글 써서 벌어먹고 살기 전까지는 결혼 생각이 없어서요. 아이 낳을 생각도 별로 없고 그래서 모아둔 돈도 별로 없어요.


그러자 그 남자가 아주 아쉬운 듯이 말했다.

-진짜요? 하.. 저는 결혼하면 무조건 아들은 하나 낳아야 하는데, 진짜 아이 낳을 생각이 없어요?


뭘 이렇게 건너뛰실까. 사실은 아이 낳을 생각만 없는 게 아니라 그 남자와 결혼 생각도, 14살이나 많은 남자를 만날 생각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런 대화를 처음 보는 자리에서 했다. 이런 말을 한 것도 어이가 없다.


지금 생각을 또 해보니, 저렇게 말하면 안 되었다. 그냥, 나이가 너무 많으셔서 별로라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사실은 내 상황이 안 좋아서 그쪽을 만나기 싫은 게 아니라 그쪽 나이가 마음에 안 들고, 그쪽 외모도 마음에 안 들고, 거기다 결혼이라는 것이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니고 무조건 아들 하나 낳아야 한다는, 그에게는 중요한 삶의 기본값이 내 마음에 안 들어서 만나기 싫다고 말했어야 하는데.


그땐 그럴 용기가 별로 없었다. 무례할 것 같기도 했고, 이번 술자리만 끝나면 되는데 싶어서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저 사람 입을 다물게 하는 게 제일 합리적일 것 같았다.


-저는 아이 낳을 주제가 안 돼요. 저는 저 하나 먹여 살리기도 바빠요. 글 쓰느라 돈을 전-혀 못 모았거든요. 아이 낳으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요.

-돈 없는 건 뭐.. 제가 많아요, 돈이.


친구 이모가 이 상황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주방에서 장난치듯 진짜 돈 많아! 하며 맞장구를 쳐주셨다.


나는 이때부터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리액션은 끝났고 갑자기 내 반응이 미적지근해지자 그 남자는 자기 말을 못 믿어서 그러는 줄 알았는지 내 친구에게 말 좀 해달라고 했다. 내 친구는 내가 이 남자의 이런 수작이 불쾌해서 기분 잡친 것을 눈치채긴 했지만, 그 남자의 재촉에 마지못해 집에 돈 많으신 건 맞아, 건물 몇 개 있으셔,라고 중얼거렸다. 더 큰 한 방이 필요했다.


-아, 맞다. 제가 돈만 못 모은 게 아니라, 빚도 있어요. 한 삼천 만원쯤. 몇 백 더 있을 수도 있고.


남자들이 간혹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부를 과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반대로 잘 보이기 싫은 남자가 나한테 호감을 보이면 빚이 있다고 말을 하곤 했다. 빚이 없어도.


대화가 이어지긴 했는데 쓰는 것도 지겹다. 돈도 많고 나이도 많은 그 아저씨는 삼천 만원 정도 갚아주는 건 일도 아니라고, 결혼만 하면 삼천 정도 되는 차도 두어 대 뽑아 줄 수 있다고 했다. 대신 자기 집안은 아들은 꼭 낳아야 한다면서.


이런 식으로 계산기 두드리는 건 아니지, 하면서도 '와, 그럼 그동안 매달 생리할 때나 쓰던 자궁 덕분에 아들 낳으면 구천만 원쯤 누릴 수 있게 되는 건가' 싶긴 했다. 내 자궁으로 그럴 수 있단 말이지, 라는 생각을 1초쯤 했으나 그러기 싫었다. 쌩으로 구천만 원을 준대도 못 할 것 같았다. 육아가 장난도 아니고, 물론 결혼할 생각도 없지만 만약 한다 치면 아무리 어리다고, 맨몸으로 들어온 며느리를 그 아저씨의 엄마가 퍽이나 좋아라 하겠다.


게다가 그 아저씨는 클 때 제대로 못 배우셨지만, 클 때 제대로 배운 남자들이 동시대 어딘가에 살고 있다.


한 여자의 몸은 그 여자 자신의 것이고, 그 여자의 인생은 그 자신의 거라고. 그러니 그걸 임신과 출산에 쓰든, 꿈에 쓰든 존중해줘야 한다고 배운 남자들. 그렇게 배운 남자를 이미 한 명 놓치긴 했지만 클 때 그렇게 배운, 그게 삶의 기본이라고 배운 남자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돈이고 나발이고 아들 타령이나 하는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삶의 기본값이 아예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친구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물었다.


-너 진짜 그렇게 빚 많아?

-아니. 그냥 그 아저씨 만나기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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