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작가 지망생과 공모전 시스템 사이에 없는 것

신뢰

by 시은

어느 해 여름, 대상이 5000만 원인 영화 트리트먼트 공모전이 있었다. 우수상과 가작 부문도 있었다.


그런데 공모 요강이 독특했다. 영화 시나리오 관련 공모전은 보통 A4용지 기준 1-2매 정도의 시놉시스와 80-100매 분량의 대본이 제출 양식이다. 그런데 이 공모전은 시놉시스 2장에 30-40매 정도의 트리트먼트 제출이 공모 양식이었다.


보통 시나리오 공모전 상금은 3000만 원에서 1억 가량이고 분량은 보통 대본 기준으로 80-100매를 요구한다. 대중성 있고 괜찮은 스토리이면 바로 감독 섭외하고 배우 투입해서 촬영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원하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적은 분량에 시세에 따른 평균적인 금액’이었다. 문제는 공모요강에 있던 한 문장이었다.


8. 심사 결과에 따라 당선작이 없거나 축소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아니 작가 지망생에게 어떻게 들리냐면, ‘전체적으로 우리 마음에 쏙 드는 트리트먼트가 없으면 아무도 안 뽑을 건데 너희가 낸 작품 안에서 한 두 장면 괜찮은 시퀀스가 있으면 쓰겠다. 도입부나 클라이맥스가 괜찮으면 그것도 그냥 사용할 거고.’라는 의미다. 아무런 돈을 지불하지 않고.


왜냐하면, ‘그 트리트먼트 전체’를 뽑은 건 아니니까.




이게 영화 제작판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고, 드라마 단막극 공모전에서도 일어난다.


모든 직업의 세계가 다 그렇지만 들어가 보면 다 두 세 다리만 건너면 그 세계 돌아가는 이야기를 알 수 있는 좁은 바닥이다.


친구의 지인이 FD로 일하는데 PD가 당선된 단막극 연출하면서 탈락된 대본의 표시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당선 대본 장면에서 하나 빼고, 탈락 대본의 어떤 한 장면으로 찍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전체적으로 스토리 퀄리티가 떨어졌더라도 그 장면만큼은 탈락 대본이 더 뛰어났던 것이다. 이런 일은 너무나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그냥 관행인 것이다.


자신의 대본이 탈락한 지망생이 우연찮게, 저런 식으로 어떤 작품에서 자신이 쓴 것 같은, 그런 장면을 본다 해도 문제 제기를 하기가 쉽지 않다. 70분 내용 중에 1-2분 장면이 내 것 같다고 해도, 저작권으로 어찌해볼 사이즈가 안 되는 문제다. 전체적인 내용과 전개가 아주 흡사해도 싸워볼까 말까 하니까.


그런, 쎄-한 경험을 나도 했다. 내가 쓴 단막극 대본과 어떤 16부작 드라마의 한 장면이 좀 겹쳤다.


스토리 라인은 비슷했다. 그리고 내 단막극 대본 자체도 엄청 기발한 아이디어는 아니고 좋게 말하면 클래식, 나쁘게 말하면 오래된 주제라서 누구나 떠올릴 만한 내용이기는 했다.


문제는 디테일의 묘사와 전개 흐름인데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과 싸우고 나서 비참함을 느끼는 장면을 묘사한 연출 방식과 배경이 내가 썼던 장면과 너무 흡사했다.


물론, 사람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라서, 내가 한 그 생각을 그 작가도 비슷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거대한 미디어 창작 시스템과 방송국 놈들이 오랫동안 우리의 등골을 뽑아 자신들을 살찌우는 전통과 역사가 있다는 걸 아는 만큼 내 찝찝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내가 의심이 많은 거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내가 경험한 인생 데이터에 따르면 믿는 것보단 의심하는 게 언제나 더 큰 도움이 되었다.




다시, 저 이상한 공모전 얘기를 해보자면 그 당시 공모전다운 공모전이 거의 없어서 지망생들은 피가 마를 때였고 당연히 영화/드라마 작가 지망생 커뮤니티에도 저 공모전에 대한 질문과 의견들이 실시간 올라왔다.


역시 사람 생각 다 비슷하다. 내가 하는 의심, 나만 하는 게 아니었다.


다들 그 문구를 의심스러워했다.


-심사 결과에 따라 당선작이 없거나 축소될 수 있습니다.


보통 괜찮은 아이디어를 영화 서사화하고 ‘기-승-전-결’이 탄탄한 대본, 혹은 트리트먼트를 만드는 데는 노련한 작가라도 초고 뽑고 수정하다 보면 7-8개월, 더 길게는 1년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그리고 만약 저 공모전에 부합하는 글을 쓴 사람이 있다면, 그걸 완성하는 데 얼마나 걸렸을지는 모르지만 공모전이 발표되고 나서 저기에 맞춰 쓴 것이라기보단, 이미 그 사람이 기획하고 쓰고 있던 작품이 저 공모전에 알맞은 작품일 확률이 높다. 그리고 거대 영화사에서 원할 만한 기획을 어떤 사람이 먼저 떠올렸다면 그 사람은 트렌드에 민감한 뛰어난 감각을 가진 사람일 텐데, 과연 그런 민감하고 뛰어난 감각을 가진 사람이 저런 눈먼 호구 잡으려는 공모전에 자기 글을 낼까?


저 말도 안 되는 공모전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작가 지망생 커뮤니티에 한번 들어와 봤는지 모르겠다. 우리 모두, 거품을 물고 욕했다. 당시 지망생들은 이 공모전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발굴 안 된 아마추어 작가들, 데뷔는 안 시켜줄 건데 신선하고 좋은 아이디어는 쏙 뽑아먹고 싶다고 말해, 도둑놈들아.


-당선작이 없거나 축소될 수 있다?

올림픽에서 출전 제한 없이 참여 가능한데 1,2,3등 안 뽑을 수도 있다는 말을 뭐 저렇게 당당하게 하냐. 죽도록 달려도 게임 끝나고 상황 봐서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아무도 안 줄 수도 있다는 말인데.


-시험을 치긴 치는데 선생님 마음에 드는 성적이 없으면 전교 1,2,3등 안 매기겠다는 말이죠?


-돈 5000만 원으로 작가 낚시질 오지게 하네.


-저런 식으로 공모전 가지고 장난치고 희망 고문해서 데뷔에 목마른 작가 지망생들 아이디어 갈취하지 말고, 그냥 기성 시나리오 작가한테 적절한 고료를 제안하고 그에 알맞은 의뢰를 하세요. 차라리 정직하고 깔끔하게.


대부분의 지망생들이 이런 마음이었다. 섣불리 공들여 쓴 트리트먼트 냈다가, 아이디어만 갈취당하고 공모전 발표날, ‘당선작 없음’ 같은 공지를 보게 될까 봐 거의 대부분 저 공모전을 위한 글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저 공모전에 대한 욕만 쓰는 것 같았다. 당연히 호구되기 싫은 지망생들의 투고가 적었을 테니 높은 품질의 트리트먼트는 없었을 것이다.


해당 공모전은 당선작을 발표하기로 했던 날짜에 공모전 당선 발표를 하지 않았고, 지금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획과 관련된 영화는 제작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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