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다고 말 못 하지만

그래도 이젠 혼자가 아니니까.

by 시은

요즘 내 최애 드라마는 <보이스 4>이다.


<보이스 1> 방영 당시 나는 콜센터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는데 회사 동료가 추천해줘서 보게 된 드라마였다. 그 동료는 가까워질 새도 없이 얼마 뒤 개인적인 사유로 갑자기 퇴사해버렸다.


여하튼, 요즘도 본방 사수해가면서 보고 있고, 어쩌면 <보이스 4> 끝나면 다시 시즌1을 정주행 할지도 모르겠다.


쓸데없는 얘기가 길어졌다. 여하튼 잘 보고 있는데 이번 주 금요일 9화에 가정폭력(양아버지의 성추행이 짐작되는 장면들이 나온다)을 견디다 못해 가출한 여고생(샛별)이 돈 때문에 납치되었다가 구출되고, 그 우여곡절 끝에 입양 가정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경찰과 상담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경찰: 가정폭력 고소, 쉽다고 말 못 해. 그래도 혼자가 아니니까 겁먹지 마.

샛별: … 나 이제 뭐하면 되는데요?

경찰: 다시 학교 다니면서 평범하게 지내면 되지. 고소 진행되는 동안 있을 쉼터 알아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사실 모든 고소는 쉽지 않다. 잘은 모르지만, 드라마 속 경찰이 말한 것처럼 가정폭력 고소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증거는, 피해자가 스스로 모아야 한다. 신체적/물리적 폭력에 대한 증거 외에도 학대로 인정될 만한 통신 이력, 주변 증거 등등.


맞았다고 해도 이미 나아서 증거로 제출할 수가 없거나, 수신자로서는 불쾌하고 섬찟한 메시지인데 판단하는 사람(판사)에 따라 그 메시지를 양육자로서 할 수 있는 정도의 말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자녀에게는 성추행범인데 주변 사람들에게는 좋은 이웃, 회사에서는 믿음직한 동료, 훌륭한 상사일 수도 있다.


심지어 이 드라마 속에서 여고생의 양부는 변호사로 나온다. 양모는 사회복지 관련 직종에서 일한다. 그래서인지 만약 현실에서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패소할 가능성이 좀 더 높다고 느껴지고(법망을 피할 수 있을 수 있게 교묘하게, 법의 선을 넘을랑말랑 괴롭혔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승소한다고 해서 그게 끝도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입양가정이 폭력/억압적이지 않다. 그리고 친부모 가정에서 학대당하는 사례도 있다. 다만 극심한 학대 가정 중, 입양 가정이 미디어에 강력하게 노출이 되어 우리도 모르게 편견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부분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여고생이 데릭 조(송승헌)에게 불안해하며 말한다.



샛별: 이러다 아빠가 쉼터로 쫓아오면 어떡해요? 하, 진짜 개무서운데.

데릭 조: 접근금지명령이라는 게 있어. 바로 신고하면 돼.




사실 나는 접근금지명령이 가해자들에게 어마어마한 효력을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법은 우리의 기대치보다 강력하지 않다. 심지어 법이 피해자 편을 들어줬는데도, 실무자인 경찰이 가해자 편을 들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가해자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편을 들어줄 누군가가 반드시 있을 거라는 걸. 그래서 이들은 법원의 명령을 가볍게 무시하기도 한다. 아래처럼.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31409685&memberNo=12282441&vType=VERTICAL


이런 상황으로 봤을 때 법은, 이게 ‘아주 최소한의 마지노 선’이라고 범죄자들에게 경고하는 거지, ‘우리를 안전하고 안심하게끔 보호해주는 선’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없는 것보단 당연히 있는 게 좋은 건 확실하다. 없는 법을 새로 입법하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힘든 일

(우리나라는… 국회가 일 안 하고 싸우거나 쉬는 경우가 많은데 그 휴무(?)를 뚫고 국회에서 찬성/반대한 후에 통과되어야 법이 된다)이고, 있는 법을 조금씩 강화하는 것이 그나마 덜 힘든 일이니까.


검색하면 다 나오는 정보이긴 하지만, 접근금지명령 위반 시 처벌 수위는 이렇다(가정폭력범죄 기준).


-행위 제한의 기준

*가정폭력행위자가 피해자 또는 가정 구성원에게 접근하는 행위의 제한

*가정폭력행위자가 피해자 또는 가정 구성원에게 전기 통신을 이용하여 접근하는 행위의 제한

*제한되는 기간: 원칙적으로 6개월, 연장 시 최장 1년.


-처벌의 기준

*위의 사항을 위반한 경우, 가정폭력행위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 또는 구류.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63조 제1항 제2호)

*상습범의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의 벌금.


+또한 이 처분이 있으면 가정폭력 피해자가 주민등록표 등본, 주민등록 초본의 열람 제한을 신청할 수 있다.




이 여고생이 가정폭력 고소를 했다고 해서 무조건 그녀가 안전하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녀가 자신을 향한 폭력에 맞서려고 했을 때 ‘뭐라도 해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폭력을 향해서, 여기까지는 해볼 수 있다는 것.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경험. 누군가는 도와준다는 느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법적 정보.


가장 중요한 건, 최소한 무력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뭐라도 하면,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무것도 없지는 않다는 느낌 말이다. 어떠한 폭력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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