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징검다리를 건너야만 해
나는 어릴 때부터 나중에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아가사 크리스티처럼 작품도 진짜 많이 써서 100 작품 정도 쓰고, 마르그리트 뒤라스처럼 책으로 인세도 많이 벌어서 그걸로 집도 사고 그런, 업계에서 인정받은 프로페셔널한 노년의 여자. 그게 내 꿈이었다.
중년의 내 모습은 잘 상상되진 않았지만 어쨌든 할머니에 대한 내 모습을 상상하는 건 꽤 괜찮았다.
중년이 내 목표지점은 아니지만, 그 징검다리는 꽤 중요하고 잘 지나가고 싶었다. 내 노년을 준비하기 위해.
9년 전 당시 만났던 남자 친구와 마트에 함께 갔을 때 타임세일 코너에 몰린 40-50대 여성들을 보며 그가 몸서리치듯 말했다.
-으, 진짜 싫다. 너는 저렇게 나이 들지 않을 거지? 너 보다가 저 사람들 보니까 정말 추해 보인다.
그녀들이 뭘 했다고. 그녀들을 향해 ‘진짜 싫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들이 도대체 뭘 어쨌단 말인가.
그리고 왜 내 젊음을 그들을 비하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건가. 도대체 이게 무슨 심보인가. 나는 아주 어린아이일 때부터 젊은 여자가 될 나의 모습이 별로 설레지 않았다. 다들 청춘이라고 치켜세워주곤 하는 20대 때도 나는 젊은 내 모습이 아주 막 자랑스럽진 않았다. 그냥 남들 다 겪는 젊음이 아닌가.
-저 사람들이 왜?
-저거 몇 푼 아끼겠다고 저렇게 몰려서 아등바등…. 내 와이프가 저러면 진짜 싫을 것 같아.
나는 웬만하면 거의 모든 문제를, 혹은 갈등을 가볍게 넘어간다. 대부분 모든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문제가 많으므로.
나는 경쟁을 싫어한다. 그래서 백화점 세일이든 마트 세일이든 시험이든 누군가와 막 경쟁해서 쟁취하고 싶은 마음이 잘 안 든다. 대학 때도 B정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혹은 이수될 정도의 점수로 만족했다. D 나온 것도 뭐, 그냥 넘어갔다. A가 나오면 좋겠지만 뭐 여하튼 그렇다.
그러니 나이 들어도 저분들처럼 아등바등 선착순 세일 품목을 쟁취하기 보다 세일 안 하는 거 그냥 좀 비싼 거 혹은 덜 좋은 걸 먹는 게 그 오빠 말대로 속 편할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또 40대를 경험하지 않은 건강하고 체력 좋은 서른도 안 된 내 생각이고 40대가 되고, 50대가 되고 결국 체력이 떨어지고, 근력이 떨어지고, 좀 더 좋은 음식을 필요로 하는 몸이 되면 나라고 안 저러고 살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아마 저분들이 20대 때, 자신이 마트 세일 때 이렇게 아등바등할 줄 몰랐던 것처럼.
아무래도 내 모습이 겹쳐 보이는, 어쩌면 내 미래가 될 수 있는 상황에는 가볍게 넘어가지지 않는다. 물론 그는 내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고 20대인 네가, 왜 40,50대 보고 뭐라고 한 소리에 열을 내냐며 예민한 사람으로 몰아붙였다.
오래전에 헤어졌지만, 가끔 인터넷이나 혹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중년 여성을 비하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 순간이 생각난다.
중년 여성이 아등바등 사는 게 어때서. 가족을 위해서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게 왜.
당연한 얘기지만 20대, 30대는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 내가 멋진 할머니가 되기 위해, 건너야 할 그 중년의 징검다리를 잘 건넜으면 좋겠다. 그게 내 목표는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