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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Oct 30. 2021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휴학

나는 대학에 대한 기대가 좀 컸다. 198n 년생들이라면 알 것이다, 1990년대 후반 논스톱이라는 캠퍼스 시트콤을.


귀여운 여학생, 생활력 강한 여학생, 웃긴데 겁나 예쁜 여학생. 그리고 귀여운 남자애, 잘생긴 남자애, 웃긴 남자애. 그들이 어우러져서 그리는 대학 생활의 낭만. 비록 내가 귀엽거나, 예쁘거나 한 그런 주인공으로서의 대학생활은 아니더라도, 내 주변에 저런 상황의 인물들이 있어서 구경이라도 할 줄 알았다. 어머, 어머, 둘이 사귄다고? 대박. 이러면서.




물론 대학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위에 나열한 캐릭터 같은 애들도 물론 없었다. 당연히 없을 수밖에. TV 속 캐릭터라는 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작가들의 철저한 계산 끝에 나오는 강렬한 창작물이고, TV에 그려지는 거의 모든 것은 대중들의 판타지를 위한 것이라는 걸, 훗날 알게 되지만 그 당시엔 몰랐고 내가 느낀 상실감은 꽤 컸다. 아주 열심히 죽도록 공부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그래도 나름 열심히,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는데, 그 수험생활에 대한 선물이 고작 이 정도뿐인 대학 생활이라니.


게다가 우리 학부는 디지털영상매스컴이라는 이름의, 꽤 그럴듯한 학 부명이라서 뭔가 재미있는 것을 배울 줄 알았다.


1학년이 들을 수 있는 관련 과목은 겨우 2-3개였다. 나머지는 기초교양과 영어 관련 수업이 3/4이었다. 학부 관련 수업이고 영어 수업이고 다 재미없었다. 친구들과 술 마시는 것이 재미없다고 할 순 없지만 대학을 안 왔대도 술 마시면 재미있을 건 뻔했다.


대학이 나한테 이럴 순 없었다. 이 배신감을 어떻게 풀 것인가. 그래도 술로 풀었다. 내가 이러려고 열심히 공부한 게 아닌데, 하면서. 그렇게 말하기엔 예비합격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결국, 이 길이 과연 내 길인가 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냉정하게 말해, 기초교양수업에서 듣는 내용은,  만든 관련 인문교양서 2-3 빡세게 읽으면  습득할  있는 내용이었다. , 물론 내가 스스로 그런 인문교양서를 찾아 읽을 인간이라는  아니지만. 여하튼.


영어수업도, 영어를 잘하고 싶었으면 내가 파고다나 YBM을 다니는 게 더 싸게 먹히는 편이었다. 아, 물론 이것도 내가 알아서 영어학원을 다닐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1학년을 마친 후, 나는 부모님께 말도 안 하고 덜컥 휴학을 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년 후, 복학을 했는데 하고 나니 왜 휴학을 했나 싶게, 나는 그렇게 별로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다. 고민의 정답은 깔끔하게 결론 나지도 않았고,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공부를 하기를 했나, 신나게 놀기를 했나, 심지어 여행도 한 번 안 했다. 몰래 한 휴학이라 학교 가는 척하고 그 시간에 알바나 했을 뿐이었다.


내가 뭘 한 건가 하는 허탈한 마음을 한구석에 안고, 그래도 1학년 때보다는 나은 수업 커리큘럼이라 마음을 붙잡고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결국 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3학년을 마치고 또 1년을 휴학하고, 다시 복학했을 때 4학년을 마치고 졸업인 줄 알았는데 1학년 때 허탈한 마음에 하지 못한 학점 관리 때문에 또 1학기를 더 다녀야 했다.


장장 7년 반의 대학생활이었고 누가 보면 정말 열심히 공부한 줄 알겠지만 졸업학점은 2.94였다.


20대 중반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1학년 때 휴학하지 말 걸. 그냥 생각하지 말고 공부할 걸. 그리고 다시 3학년 마치고 또 휴학했는데 그러지 말 걸. 주변에서 휴학한다고 하면, 내 경험을 빗대서 그냥 하지 말라고 했다. 쉬는 사이 등록금만 쳐 오른다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때 휴학 잘한 것 같다. 딱히 뭘 한 것도 없고, 한 게 없으니 당연히 해낸 것도 없는 시간이었다. 그때도 공모전에 내려고 습작을 하긴 했지만 이 길이 내 길인가에 고민이 내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당연히 글도 다 그런, 암울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미래에 대한 내용의 스토리뿐이었다.


그런데 30대 후반이 되고 보니 고민하느라 그때그때 내 인생에 쉼표를 찍고 쉬는 시간을 길게 준 덕분에 지금 별로 방황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1-2년 전까지만 해도 휴학을 한 게 잘한 일 같지가 않았다. 차라리 일이라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을 모았으면 한 달에 150만 원씩 모았다고 하면 6000만 원가량을 모았을 시간이었다.


지나가버린 일이니 잘못한 일이라고 자책하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20대에 고민한답시고 3년 반을?이라고 생각하면 왜 그러고 살았나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20대 때 좀 더 다른 길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40세가 가까워진 지금 하면, 그것도 쉽지 않을 텐데 그때그때 쉬면서 이 길 말고 다른 길을 생각해보자 하면서 보냈던, 몇 년의 ‘별 거 안 한 시간들’ 덕분에 나는 지금 와서 별로 다른 길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렇게 고민을 했으나 결국 나는 쓰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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