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남자가 주인공인 로맨스를 우리가 보겠어요?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이름은 김영수. 나이는 41세. 평균이거나 평균 살짝 이하의 외모, 그래도 유명 백화점 여성복 매장 과장이다.
그는 과분하게도 초절정 미인인 아내를 얻었지만 한 번도 아내에게 최선을 다한 적이 없다. 자신의 부탁(심부름)으로 물건을 갖다 주기 위해 직장에 온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소리를 지른다. 어떤, 확실한 물증을 봤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그의 직장 비리에 대한 질문을 한 아내에게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내 눈앞에서 물건을 발로 차고 집에 가라고 하는 그런 남자다. 그러면서 가족을 위해 몸 바쳐 일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런 남자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아내에 대해, 전원주 같이 생긴 자신의 엄마와 똑같이 생겨서 좋아한다고 말하는 뚫린 입으로 못하는 말이 없는 남자.
그러면서도 가족이니까 이해해줘야지,라고 자기 합리화하며 “미안해, 이번만 이해해줘.” “다음엔 약속 꼭 지킬게.” “이게 다 우리 가족 나중에 편하게 살자고 하는 건데...”를 입에 달고 산다.
그는 1년 365일 격무에 시달리다 결국 과로로 세상을 뜬다.
못난이 만년 과장 루저 대디, 김영수.
이 인물은 2016년 SBS 드라마 <돌아와요 아저씨> 속 김인권이 연기한 캐릭터다.
비와 이하늬, 이민정, 오연서, 김수로가 주인공으로 나왔고, 6.6%의 시청률로 시작해 2.6% 로 막을 내린 드라마. 내가 생각하는 인생 최악의 드라마.
드라마는 주로 누가 보는 콘텐츠인가. 주부인 여성들이 많이 본다. 재미와 보편성을 많이 확보한다면 여자 남자,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가리지 않고 보겠지만 기본적으로 밤 10시 드라마는 월화든, 수목이든 기혼여성들이, 그 다음으로 미혼여성들이 가장 많이 본다.
그런데 어떤 주부가, 어떤 여성이, 일만 쳐하고 살갑게 잘해주지도 않고 이민정처럼 생긴 나한테 전원주 같다고 가스 라이팅 하며 말하는 남편 놈이, 그 와중에 또 일만 쳐하다 죽었는데, 이대로는 못 죽겠다며 외모는 정지훈, 신분은 점장으로 신분 세탁해서 돌아온다고 해서 고맙겠는가. 그냥 저 세상 가주는 게 고맙지.
지금의 법적 기준으로 보면, 이건 거의 저승까지 가서 이어지는 스토킹이다.
어차피 내 돈 아니니 이런 생각까지 들진 않는데 처음으로 제작비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한 드라마였다. 가스라이팅과 스토킹을 미화하는 드라마라니.
시청자인 우리가 보기에, 드라마 속 김영수의 아내(이민정 분)의 상황은 성공에 눈이 멀어서 일만 하고 정서적 학대와 가스 라이팅을 하던 남편(전-김인권, 현-정지훈)이 죽었다고 알고 있는데, 남편이 전혀 모르는 새로운 잘생긴 얼굴로 좋은 지위를 가진 채, 직장 상사가 되어 자기 주변에 맴도는 것이다. 이 섬뜩한 남자를 왜 살려주고 왜 이런 좋은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것일까, 무섭게.
이런 내용을, 주부들이, 여자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돈 많고 잘생겨져서 다시 나를 찾아와 준 것에서? 돈과 외모, 중요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가세요, 아저씨.
이 드라마의 제목은 그로부터 10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2006년 SBS <돌아와요 순애씨>에서 빌려왔을 것이다. 그 당시 스트리밍 서비스가 없어서 본방사수가 당연한 것을 감안해도 초반에 10%대의 시청률로 시작해, 마지막 회에는 25.8%로 마무리한 성공적인 드라마였다.
제목은 비슷해 보이지만, 내용은 결 자체가 다르다.
평범한 가정주부 40대 여성 순애가 교통사고로 인해 남편의 상간녀인 20대 초은의 몸으로 바뀌고, 초은은 40대의 순애가 되면서 그녀를 이해하고, 순애는 20대의 젊음이 주는 관심 어린 시선과 즐거움을 조금이나마 누린다. 마지막엔 두 여자가 힘을 합쳐 자신들을 기만한 남편이자 남자 친구인 그 남자를 함께 엿 먹인다는 이야기니까.
이게 여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내용이다. <돌아와요 순애씨>는 비록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한 번쯤 겪었으면 좋겠는 상황, 바로 그런 이야기를 그렸다.
하지만 <돌아와요 아저씨>는 여자들이 일상에서 공포로 느낄 만한 상황을 멋진 외모의 배우들로 포장해서 들이밀며 ‘너네, 이런 거 좋아하지?’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니 여자들이, 그걸 좋다고 봤겠는가.
ps.
아, <돌아와요 아저씨>가 쫄딱 망한 치명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이 드라마는 제2의 <돌아와요 순애씨>의 인기를 노리며 동일하게 SBS 수목드라마로 방영되었는데 첫 방영 날짜가 2016년 2월 24일 수요일이었다.
그리고 하필 이 날은 KBS <태양의 후예> 첫 방영 날이었다. 난 태양의 후예를 보진 않았지만, 어떤 정신 나간 여자가 김영수를 보겠는가, 유시진을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