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이
오래 전, 마음에 관한 에세이를 쓴 작가들 3명이 함께 하는 북토크에 간 적이 있다.
정확히 그걸 알고 간 건 아니고 그냥 자주 가던 합정동 책방에 들렀는데 거기서 그런 걸 한다길래 죽치고 앉아 있다가 북토크 하는 시간 되서 들었던 거지만.
역시 사람은 돌아다녀야 해. 하지만 돌아다니는 사람이 확 줄었던 어느 시기, 꽤 컸던 그 카페는 망해서 문을 닫고 말았다. 꽤 좋았는데.
그 책을 함께 쓴 작가 3분은 심한 우울증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울증이 없지는 않아서, 이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그러다 보니 이런 감정, 이런 마음에 대해 설명할 만한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집필 동기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가 무슨 질문에 대해 작가 c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제일 신경쓰이는 게 뭐냐면, ‘이 책에 나온 제’가 저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무슨 말이냐면 가끔 심하게 우울해요. 보통 사람들이 겪는 정도보다 좀 심각한 것 같다는 생각에 몇 년 전에 진료를 받게 되었고 진단 결과 저는 우울증이 있는 게 맞아요. 근데 우울을 겪는 건 사실이지만 365일, 24시간 우울한 건 아니거든요. 근데 이 책을 완성하고 보니 이 중에 제가 우울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한 거 같더라구요. 제가 봐도제가 아주 우울한 사람 같고. 근데 그게 저의 100% 모습은 아니에요.
그런데 이 책을 읽으신 분이 c는 아주 우울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제가 기분 좋을 때 만나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럼 그 분은 아마 제가 ‘밝아보이려고 연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진짜 그 날은 제가 기분이 좋아서 그렇게 대한 건데.
그리고 다른 곳에서 어떤 글 의뢰를 받았을 때, 아주 웃긴 에피소드가 있어서 그에 대한 글을 썼고 저를 아주 웃긴 애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근데 저를 웃긴 애로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 제가 기분이 다운되어 있으면 그 사람들은 또 저를 ‘글 팔아먹으려고 거짓된 글을 쓰는 사람’으로 오해를 할 수 있다는 거죠. 지금 말해드린 두 가지 상황 모두 있었던 상황이고 저는 이런 것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겠던 적이 몇 번 있어요. 우울한 것도 나고, 밝은 것도 나인 게 맞는데 제가 매번 연기를 하는, 가식을 떠는 사람으로 보여지는 거에요.
매번 제가 어떤 사람인지 왜 지금 제 기분이 이런지 설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럴 수는 없잖아요. 잠깐 만나게 된 상황에서, 제 글을 읽긴 했지만 저를 잘 알지 못하는 분과 길게 대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은 것도 있고, 만에 하나 둘 다 원한다 해도 전혀 그럴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고.
그런 식으로 왜곡되는 제가 있더라구요. 이게 오랜 시간 글을 쓸 때마다 고민이었어요. 너무 우울한 걸 쓰지 말까? 웃긴 글을 쓰지 말까? 아예 그냥 무난한 것만 쓸까.
근데 그러면 쓸 게 없어요. 이제는 오해해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마음을 놓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긴 했어요.
이 대답을 듣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 글을 쓰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왜곡된 버젼의 나로 저장되겠구나.
아무리 솔직하게 말한다 해도, 아무리 솔직한 글을 써도. ‘글을 아주 아주 많이 써서’ 최대한 많은 모습의 나를 보여주면, 최대한 ‘나에 가까운 나’로 보여질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욕심일 것 같다.
아무리 많이 보여준다 해도 결국 보여주지 못하는 부분이 없지 않을 테니까.
그건 다행인 걸까, 불행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