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의 간절한 말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닌 것 같아
내가 최근에 가장 인상 깊게 본 드라마는 드라마 <연인>이다.
여주인공인 길채(안은진)와 남주인공인 장현(남궁민)이 끝내 이어지지 않은 상태로 Part 1이 끝났고, Part 2에서는 아무래도 길채가 나올 확률이 적음을 추측하게 하는 결말로 엔딩이 되었기 때문에 비난 여론이 조금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조선시대 여성 중에 이렇게 너무 산뜻한 캐릭터가 있었나 싶게 길채라는 인물은 신선하고 강인하고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고... 무엇보다 합리적인 인간이다.
뭐랄까, 다산 정약용의 실학을 인간으로 만든다면 길채라는 인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합리적이다. 심지어 사랑 앞에서도. 하지만 그런 합리적인 면 때문에 욕을 먹는 것 같다.
전통적으로, 조선 시대 여성들은 사랑 앞에서 목숨을 걸거나 그 남자를 위해 헌신하고 남자가 가는 곳이 어디든 따라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길채라는 인물은 몹시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길채는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능금리라는 고을의 양반집 규수인데, 성격은 지랄맞지만 그 와중에 자기 이쁜 건 알아가지고, (우리가 아는 조선의 전통 여인상과 다르게) 동네 도령들한테 온갖 플러팅을 다 한다.
못 본 새 멋있어지신 것 같다, 도령 덕분에 제가 살았다 등등 눈웃음을 쳐가며, 자연스럽게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당연히 동네에서 소문은 안 좋다. 불여시가 그녀의 애칭이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흘러들어온 장현(남궁민)과 혐관로맨스(처음엔 싫어하다가 사랑에 빠지는 사이)를 형성하는데 병자호란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알면서도 계속 만남이 엇갈리고, 서로를 그리워하던 마음이 극에 달했을 무렵, 주변의 방해로 장현이 죽었다고 믿게 되는 길채가 자신과 가족을 걱정하며 챙기는 다른 남자와 혼인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장현이 불쑥 나타나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장현이 굳은 얼굴로, 심양(중국)에 일이 있었다고, 일찍 오고 싶었지만 올 수 없었다고 말하자 길채가 말한다.
길채 : 일? 도련님께 전 언제나 뒷전이지요. 제 온전한 마음을 원한다면서,
정작 도련님은 항시 다른 일이 우선이지 않습니까. 하긴 기다린 제가 모자란 사람입니다.
라며 허탈해하며 서로의 마음을 정리하자는 길채에게 장현이 "정혼할 사내가 있건, 아니, 당신 생각 따위도 상관없어. 당신 이제 내가 가져야겠어." 라며 이기적으로 소리치고, 사실 그녀 역시 그에 대한 사랑이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으면서도 그의 이기심에는 질리고 만다.
길채 : (허탈해 웃고 마는) 이게 이장현이지. 뭐든, 언제든, 제멋대로인 인간.
그 말을 남기고 길채가 집으로 돌아가려 하자 장현은 그녀를 붙잡는다.
장현 : 낭자, 제발 내게도 한 번만 기회를 주시오. 내 다시는 낭자를 두고 떠나지 않으리다.
다시는 낭자를 기다리게 하지도 않으리다.
그러니, 제발 내게도 한 번만 기회를 주시오.
라며.
집으로 돌아온 길채는 절친인 은애에게, 울먹이며 장현 도령이 함께 떠나자고 했다고 털어놓으며, 그렇지만 뭘 믿고 함께 떠나냐며 안 가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길채는 마음 정리가 확실히 된 것은 아니었다. 장현이 자신과 함께 조선을 떠나자고 말하며 손을 내밀고, 길채가 망설이자 장현은 이렇게 말한다.
장현 : 지금 이 손을 잡지 않으면, 내 낭자를 떠나 다시는 낭자 앞에 나타나지 않겠소.
라고.
망설이던 길채는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린 듯 피식 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눈물도 떨어진다.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그의 간절함을 외면한다.
도련님을 못 본다 하면 겁이라도 낼 줄 알았느냐며. 도련님은 항시 이렇다며, 그 잘난 혀로 자신을 희롱하며, 안절부절하게 하고 기다리게 하고 애태우는 걸 즐기는 거라며.
아마도 두 사람의 이 결말(거의 90%이상 이별이 확실시되는 결말)을 욕하는 사람들은 이장현(남궁민)의 간절함, 매달리는 모습에 큰 점수를 준 듯하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장현을 외면하는 길채의 선택을 그린 작가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훗날 길채가 혼인하기로 마음먹은 사내인 원무는 처음에 여러 번 거절을 당한다. 아직 장현에 대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대장간 일을 하며 돈을 버는 자신의 상황을 굉장히 만족스러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보는 남자들의 시선은 다르다. 그녀를 짝사랑하는 종사관 원무 역시 마찬가지다. 경제력 있는 양반 사내가 지아비로 있지 않아서 저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며 그 삶을 길채가 벗어나고 싶을 것이라 지레 추측하고 자신이 구해주고 싶다는 식으로 말한다.
낭자가 험한 일을 하는 것이 마음 아프다며,
낭자가 자신과 혼인한다면 다시는 이런 험한 일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길채 : 사내들은 제가 웃으면 상냥한 아내가 될 거라 여기고, 제가 다정하면 조신만 며느리가 될 거라 짐작하죠. 지금은 잠시 앙큼해도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면 달라질 것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전 달라지지 않아요. 제 웃는 얼굴을 좋아하는 사내는 많아도, 제 고약한 모습까지 좋아하는 사내는 없죠.
하지만 나리, 전 제가 가진 것 중 이것은 가져가고 저것은 남겨둘 순 없답니다.
그러니 종사관 님도 제게 미련을 버리세요.
라고 말하며 거절한다.
나는 길채의 이 대사가,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연히 운명적인 사랑이라 여기는 장현과의 관계에서도.
길채는 장현을 사랑하지만, 장현에게는 '능력있고 자신감 있는 모습' 말고도,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에는 '그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태도'가 공존하고 있다.
'어떤 대단한 능력'과, '그런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은 한 세트이다.
장현은 사업 감각과 귀한 물건을 비싸게 거래하는 능력이 몹시 뛰어나 그 능력으로 큰 부를 얻었다. 그리고 그 능력 덕분에 죽을 뻔했던 순간에 목숨을 건진 적도 많다. 그런 그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자신의 뛰어난 사업감각과 거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기회들'을 길채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매 순간 포기할 수 있을까?
사랑을 쟁취한 후, 당장의 몇 번은 양보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게 하고, 부를 늘려주는 자신의 능력을 평생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길채로 인해 그런 기회들을 포기한다면 길채를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고, 그 마음은 고스란히 당사자에게 전달될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엔 생계를 위해 자신의 사업능력을 펼쳐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반복될 그 상황은, 과거에 길채에게 자신의 생존을 알리지도 않을 만큼 그녀를 뒷전으로 두면서 이뤄냈던 것처럼, 다시 그녀를 방치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장현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것이다. 그게 비록 생계를 위해서라고 해도 그녀를 다시금 상처 주면서 말이다.
길채는 장현을 선택한다면,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조선을 떠나 장현과 심양으로 떠난다면, 능력있고 멋진 이 남자가 자신의 남자가 된다는 것을 알지만, 일을 할 때만큼은 자신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만큼이나 내팽개치고 일만 하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생존사실조차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일만 쳐하는, 이기적인 모습까지 함께 감당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장현은 그런 길채를 향해, 내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시오,라고 매달렸지만 길채는 무심결에 느낀 것이다.
사랑하는 그의 손을 잡으면 자신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걸. 조선에 있는 가족, 친구, 자신의 쌓아 올린 일.
절대 그의 매력있는 부분만 골라서 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가 반드시 되풀이할 모든 이기적인 선택과 그로 인해 자신에게 훨씬 불리할, 수 만 번의 상황을 가족도 없는 타지에서 매번 혼자 감내해야 한다는 걸.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되돌릴 수 없는 불리한 순간이 사는 내내 반복되리라는 것을. 사랑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걸 아는 이 합리적인 인간, '실학의 인간화' 그 자체인 인간 길채는 절대 사랑만 믿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느끼고 장현의 손을 잡지 않은 것이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은, 특히나 사랑은 도박 같은 마음으로 하면 안 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