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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괜찮아진 것들

술안주였던 옛 인연

by 시은

예전에 술만 마시면 그렇게 씹어댔던 전남친이 있었다. 그도 자신의 친구들에게 나를 씹었다는 증거가 아주 많이 있어서 그때나 지금이나 미안하지는 않다.


헤어짐을 결심했을 때는 미안했다. 그 미안함을 깡그리 소멸시킨 건 그의 무례한 이별 태도였다. 아련하게 기억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서로가 맞지 않다는 게 너무나 분명해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가 원하는 작가의 삶을 지지하지 않았고, 그 삶을 심지어 무모하다고 비난했다.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그를 보며, 나는 그가 원하는 삶인, 안정적이되 아무것도 도전하지 말아야 하는 삶에 내가 흡수되기 싫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같이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걸 느끼자 헤어짐이 힘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내 뒤를 쫓아다녔다. 그걸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내가 널 어디서 보고 있다, 는 걸 메신저를 통해 나에게 당당히 얘기했다. 나는 그가 어디 있는지 안 보이는 곳에서.


두 달 정도 그 일을 겪어야 했다. 그것도 그가 포기해서가 끝난 것이 아니라 내가 서울로 상경하면서 이사해버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제 궁금한 이야기Y를 봤는데 지금도 스토킹에 관한 법률은 관대해서 스토킹을 한 게 증명이 되더라도 1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이 다다. 스토커 입장이라면 저 정도 벌금은 감수하고 한번 해볼 만한 일일 수 있겠다 싶은 금액 같다. 10만원이라는 금액은 자기 밥벌이 하는 성인에게 경제적으로 엄청난 피해다, 하면 절대 안 되겠다고 느껴지는 금액이 아니다. 까놓고 말해 치킨 5번만 참으면 되는 금액이다.


어제 궁금한 이야기 Y에서 보니까 스토킹이 입증되도 경찰서엔 불려가지만 그렇게 대단한 사회적 패널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변에 크게 알려지는 것도 아니며 모자이크 처리 다 해주고 스토커는 그 와중에 자기도 인권이 있는데 찍지 말아달라고 하고 다 큰 성인인데 불려다녀서 수치스럽고 신경이 예민해져서 약먹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곧은 자세로 인터뷰를 끊고 걸어가며 떨지도 않았다.


요새 나는 그를 술안주 삼지 않는다. 꿈을 이루겠다고 상경하면서 상당히 떨어지게 된 물리적 거리가 가장 큰 안도감을 주었다. 그는 그곳에서 밥벌이를 해야 하니 여기까지 따라오지는 못 하겠지. 이제 내가 사는 곳을 모르니 스토킹을 못 하겠지, 하는 안도감.


물론 상당히 많이 흐른 시간도 무시 못할 것이고 내가 그를 욕할 때마다 같이 욕해준 많은 친구들의 응원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제 하루 종일 누워있었더니 지금보다 어렸을 20대 때보다 체력이나 좋아하는 일에 미칠듯한 느낌을 주던 열정은 많이 줄어들었어도, 미칠 듯이 분노하던 일에 분노하지 않게 되는 것도 조금씩 나이를 먹으며 좋아지는 일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일이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과거완료형이라서 그럴 수 있는 거지만.

봄이 증명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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