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2nd
그리고 새해부터 꼬박꼬박 월세를 낼 수 있었으면 얼마나 훈훈했을까. 새해고 뭐고, 그 다음달인 1월에도 또 돈이 모자랐다. 하필, 또 3만원이었다. 이젠 정말, 부모님이나, 친구들한테 돈을 빌려야했다.
시나리오작업은 계속 해야 했기에 부족한 스킬들을 채우느라 플롯 관련 특강을 듣고 나오는 길이었다.
수업을 듣는 동안에는 잊고자 했으나 현실이 그렇게 쉽게 잊혀지는 것이 아니어서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허기져서 뭔가 제대로 된 걸 먹고 싶은데 돈이 없었다. 결국 편의점에서 맥주 1캔과 마이쮸를 사서 나왔다. 마이쮸라니. 맥주엔 치킨인데.
근처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마이쮸를 먹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있었는지, 늦게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꼬맹이가 나를 불렀다.
-아줌마.
만이긴 해도 서른은 아줌마가 아니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아줌마로 보일 정도로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그날도 멀쩡하게 입고 나갔다. 그래서 설마 나일까 했다.
꼬맹이가 있는 줄도 몰랐으니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었겠지만, 그래도 설마 했으므로 무시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 꼬맹이가 다가왔다. 걔가 어디에 앉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나를 불렀다. 이번엔 정확히 나를 부른다는 것을 알게끔 불렀다.
-아줌마. 마이쮸 맛있어요?
나구나. 나를 아줌마로 불렀구나. 나 아줌마 아닌데. 작년에 만 29살이었는데.
-아줌마 아니야. 나 서른밖에 안 됐어.
-우리 엄마 스물아홉인데 아줌만데요.
소중한 정보, 쓸데없지만 잘 들었다.
-어쨌든 난 아줌마 아니야.
-마이쮸 맛있어요?
마이쮸가 먹고 싶은 거였다. 5살인가, 6살인 아이는 꽤 똘똘했다. 마이쮸는 걔가 다 먹었다. 앞니 다 빠진 애가 뭘 그렇게 잘 먹는지. 그렇게 30-40분쯤 애가 떠드는 걸 듣고 있는데 놀이터 저만치 차가 한 대 섰다.
무슨 차였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여자들이 좋아하는 종류의 차에서 한 여자가 내렸는데, 꼬맹이가 엄마! 하면서 달려갔다. 저렇게 생긴 사람이 엄마면 내가 아줌마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굉장히 예뻤다. 아마 내가 잘 몰라서 그렇지 sns 셀럽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이와 엄마가 가게 내버려둬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저기요. 어머니.
하고 말을 걸었다.
그리고 지난 달 집주인에 이어 새로운 사람에게 구질구질한 내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제가 글을 쓰려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잘 안 되었다. 그래서 인생도 막막하고 해서 맥주에 마이쮸를 안주 삼아 먹고 있었는데 댁의 아들이 제 마이쮸를 다 먹었다. 물론 이게 비상식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겠으나 가엾은 사람 도와준다 생각하고 제가 마이쮸 안주 대신 치킨을 먹을 수 있게 2만원만 주시면 안 되겠느냐 이런 류의 얘기를 했다. 추워서 제 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지긴 했는데 지금 이 상황 때문인지, 맥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부족한 건 3만원이었는데 차마 치킨값으로 3만원을 부를 용기가 없었다.
아이 어머니는 정말 내 얼굴을 뚫어지게 봤다. 나도 피할 수는 없어서 그 분 얼굴을 봤다. 내 상황이 창피하긴 했지만, 이대로 가면 주든, 안 주든, 어차피 마주칠 일도 없으니 본전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진짜 예쁜 사람의 얼굴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그분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봤는지 모르겠다.
그리곤 지갑을 열어서 지폐 두장을 건네는데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 하며 인사를 했다.
그런데 만원짜리 색깔이 아닌 거다. 내가 화를 내려는 찰나 그 어머니는 뒤돌아서 이미 차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더럽고 치사해서 되돌려주려고 다가가면서 돈을 다시 보니, 5만원 두 장이었다. 차가 출발하고, 아이가 그 사이 친해졌다고 차 안에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꼭 그 꼬맹이가 잘 되길 빌어주었다. 진심으로.
그리고 방세를 내고, 치킨을 사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