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기

얼음컵

by 시은


그런 호의들이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5만원, 10만원의 호의. 사람은 만나는 사람들에 의해 그 결이 다듬어진다고 한다. 나는 결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내가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 한동안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면 친구들은 내 글의 안부를 묻곤 했다. 잘 쓰고 있는지. 잘 될 거 같은지. 근거는 없었지만 나는 왠지 진짜 잘 될 것 같았고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장담하고 확신 가능한 일은 아니라서, 그냥 열심히 쓰고 있다고 했다.


-그거 갖고 되니? 그냥 열심히 쓰지 말고, 진짜 어디 한 군데 부러지거나 피 나오게 열심히 쓰라고.

-야, 내 글 걱정 말고 내 걱정도 가끔 좀 해.

-넌 걱정 안 해도 잘 살 애야. 니 글 열심히 써.

-야, 글 매일 쓰고, 나도 힘들게 살고 있어.

-요즘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어. 다 힘들지. 하고 싶은 거 도전하는 것도 복이야. 그리고 넌 무인도 가서도 살아남을 애라고 몇 번을 말해. 니 글, 니가 안 쓰면 누가 대신 써주는 것 아니다. 그럼 세상에 니 글은 못 나오는 거야. 그럼 너도 인생에 답 없는 거야. 글 쓴다고 올라갔다며. 잘 될 팔자여도, 노력은 해야 잘 풀리는 거 모르니? 내가 이걸 꼭 말해줘야 되니? 너 뭐 서울에 놀러 갔냐?


내 친구들은 다 냉철하다. 문과와 예체능 계열인데 다들 이렇게 내가 조금이라도 징징거릴라 치면 나의 상황에 대해 냉정하고 정확하게 조언을 해주었다.


먹고 살기 힘든 시대라서 그런지, 그래도 너라면 막연히 잘 할 거다, 잘 될 거니까 힘내! 하는,

문과나 예체능 특유의 낙관적이고 이상적인 응원 같은 게 전혀 없었다.


틀린 말이 하나 없는데 그래도 서운했다. 근근히 살고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서운했다.


어쨌든 겨울이 가고 봄도 갔다. 여름이 왔다.


부산은 습도가 좀 높을 때가 있긴 한데 전반적으로 엄청 덥진 않다. 서울의 여름은 엄청나게 더웠다. 정신없이 지나간 첫여름보다 더 더운 것 같았다.


원룸에는 에어컨이 있었다. 하지만 공기가 차가운 것과 별개로 엄청 시원한 걸 먹고 싶은 그런 게 있다.

원룸 냉장고는 정사각의 냉장만 되는 초소형이라 얼음을 얼릴 수는 없었다.


아르바이트지만 출근을 안 하는 날이면 집에서 글을 썼는데 밖에서 먹는 커피가 비싸게 느껴져서 소셜로 20개들이 아메리카노팩을 사놓고 먹고 있었다.


평소에는 상관이 없었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시원하게 먹어도 되고 없어보일지 몰라도 뜨겁게 먹고 싶으면 전자렌지에 데워서 먹었다.


평소에는 괜찮았는데 너무 덥자, 하루는 얼음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음컵을 사서 커피를 따라 마셨다. 너무 좋았다.


그렇게, 한번을 얼음이 든 커피를 먹고 나니 그 다음부터 얼음 없이는 커피를 먹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지금은 작은 얼음컵 값이 올랐지만, 그땐 400원이었다. 뭘 더 사먹지 않기 위해 항상 30m정도 거리의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 정말 딱 400원만 들고 나갔다.


어느날, 편의점에 400원짜리 컵이 없었다. 10시에서 11시 사이였다.


없으면 진짜 안 될 것 같은데, 내가 안 될 것 같다고 세상에 별 일이 일어날 리 없겠지만, 나는 지금 400원밖에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지금 나에겐 400원짜리 얼음컵이 반드시 있어야 되는데 있는 건 큰 컵, 600원짜리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얼음컵이 언제 들어오냐고 물어보니 2시에 들어온다고 했다. 얼음 없이 버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 3시간 반 동안 얼음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집에도 200원은 없었다. 있다고 해도 들고 나오기는 귀찮았겠지만.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는데 편의점 아주머니가 말했다.


-그냥 가져가세요. 돈 나중에 주시고.

-네?


구멍가게나 슈퍼도 아니고 편의점에서 이런 편의를 제공받을 줄이야.


-더운데 또 나오면 힘 빠지잖아요. 나중에 들를 때 같이 주세요.


다정다감한 사장님. 이런 저런 배려가 많았다. 동네를 잘 잡았나 보다.


친구들이 서울 물가 비싸지 않냐고 서울살이 빡빡하지 않느냐고 물어볼 때, 이렇게 말했다.


다 사람 사는 데고 살 만 한 곳이라고. 내가 사 먹는 건 대부분 소셜구매와 편의점 음식이고, 그건 서울이라고 더 비싸고 부산이라 더 싸고 그럴 게 없는 고정 가격이라서 괜찮다고 말했다.


좀 구구절절한 설득의 과정이 있긴 했지만 방세 깎아주는 집주인도 있었고,


말도 안 되는 이유지만, 치킨값을 선선이 후원해준 아이 어머니도 있었고,


여름날, 아마도 얼굴에 기름 흘리며 나왔을 동네주민에게 단골이라고 외상을 주는 편의점도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버텼었나 보다. 사실 버틴다는 생각도 안 했다. 그냥 그렇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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