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을 덜 당한다
나는 TV가 없다.
요새는 티빙으로 몇몇 프로그램을 보지만 1-2년 전에는 아무리 핫한 프로그램이 있어도 볼 도구가 없으니 남의 나라 얘기였다. 사람들이 ‘그거 봤어?’ ‘정말 재밌어!’ 하고 말을 걸면 ‘죄송해요. 저 집에 TV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라도 사람들의 대화에 끼고 싶어서 볼 법도 하고, 뭔가 궁금해서 유튜브로 검색해볼 정도의 노력은 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유튜브를 아예 안 보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핫한 프로그램 중에 하트 시그널이 있었다. 죽었던 연애 세포가 확 다 살아나는 기분이라고 십몇 년째 한 사람과 연애 중인 한 언니가 말했다. 나는 한 번도 그 프로그램을 본 적이 없다.
방송국 놈들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야, 라는 예전에 친하게 지냈던 방송작가 친구들의 직장 내부 고발 같은 충고 때문이 아니고 피곤해서였다.
한번 빠지면 난 잘 못 헤어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시작을 잘 안 하려는 편이기 때문에.
나는 내 습관보다 강한 사람이 아니다.
습관은 웬만해선 나를 이긴다. 거의 그랬다.
뭔가에 빠지면 매일 꼭 챙겨보고 싶고(매일 하는 프로그램이 아닌데도), 그래서 여러 번 보고 싶고 그렇다.
왕좌의 게임을 시작할 때를 이야기하자면, 내 마음은 이랬다. 뭔가 내 스타일일 거 같긴 한데 그래 봐야 뭐 얼마나 내 스타일이겠어하고 시작해서는 시즌1부터 7까지 각 시즌별로 4-5번씩 본 것 같다. 솔직히 시즌 2 하고 5는 10번 봤다.
올해 초, 하트 시그널 거기에 나온 패널 중 한 명은 음주운전으로, 한 명은 성범죄에 연루된 것이 기사화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기사를 통해 그들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봤다. 썸 타는 것으로 애간장을 녹였다 어쨌다 하는 기사 뜰 땐 그냥 지나쳐보다 처음으로 제대로 봤다. 방송에 나올 법한 인물이어야 할 테니 당연한 얘기지만 객관적으로 정말 멀끔하게, 아니 잘 생긴 외모였다. 하지만 내가 든 생각은 그래 봐야 범법자인데 라는 생각 말고는 딱히 떠오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을 한동안 사랑한 이들은 나 같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 같은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더 허탈감도 크고, 돈을 훔쳐간 것도 아닌데 사기당한 기분도 들 것 같았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고 보는 건 무의식 중에 호감이 반영되고, 그 사람을 응원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니까.
지금도 예전처럼 그때그때 남들이 미친 듯이 열광할 때 함께 열광하지 못한다. 성격인 것 같다. 꿈꿔본 적도 없지만 인싸나 셀럽 같은 게 되기는 틀린 것 같다.
인기가 많고 아무리 대중적인 것이어도 내 취향과 맞닿지 않으면 관심이 1도 안 가는 성격인 걸 보니 아마 다음생에도 그런 삶을 살긴 글렀을 거다.
하지만 사실 이미지 메이킹일 수도 있는 그들의 모습에 열광할 시간을 살짝 비켜 살 수 있어서 훗날 그들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을 때 어이없어할 필요가 없는, 그런 이점이 있다.
아주 크게 대단한 이점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