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놀던 세계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이 모이면 각자의 시나리오 이야기를 하며 정보를 교류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모이면 반은 영양가 없는 얘기일 때도 많다.
가끔 하는 수상소감 김칫국 놀이와 비슷한 빈도로 우리 대화의 주제가 되는 것은 자기 작품에 출연시키고 싶은 배우 가상 캐스팅이 누구인지 이야기해보는 것이다. 나는, 이 사람 연기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쓴다, 는 것을 오픈하는 것이다. 그러면 피드백이 좀 디테일해지기도 한다. 물론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식으로 동의를 못 구할 때도 있다.
그렇게 배우 이야기를 하다가 시나리오 캐릭터와 전혀 상관없이 개인의 취향이라는 것이 고개를 든다. 예를 들면, 가상 캐스팅엔 나오지 않았는데도 박보영을 좋아하는 내가 박보영 이야기를 시작하면 시나리오 이야기는 안드로메다로 가기도 한다.
-박보영, 너무 귀여워!! 하... 박보영이랑 작품하면서 친해지고 싶다.... 90년생 왜 이렇게 귀엽.....
하지만 누가 생각해도 내 시나리오 주인공은 박보영과는 갭이 있다. 그런데 이 무리 중에 90년생이 있으면 대화가 이렇게 된다.
-ㅇㅇ아, 너 90년생이니까 니가 박보영이랑 친해질 확률이 제일 높아. 친해져서 나 좀 소개시켜줘. 동갑내기 친구잖아. 내가 훨씬 가난하지만 내가 보영이 밥은 다 사줄 수 있어.
-제가요? 저는 박보영 그렇게까지 안 좋아하는데....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친해지고 싶다, 이런 마음이라도 먹고 있어, 그럼.
-그럼 언니는 85니까 송중기랑 친해지세요. 제 이상형 송중기임.
-중기는 임자 있잖아(결혼발표가 막 이루어진 시점이었다). 그리고 박보영이랑 친해져서 송중기까지 친해지면 되잖아.
이런 헛소리가 점점 몸을 부풀리고 있는데 84년생 언니가 말한다.
-시은아, 우리 다시 시나리오 얘기 좀.
나는 시나리오도 시나리오지만 이왕 동갑내기 한 명씩 찾은 김에 언니의 친구도 찾아주고 싶어 진다.
-언니는 84년생 친구 누구 없어요?
-스칼렛 요한슨. 출연 안 해줘도 되니까 친해지고 싶다.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안 친해져도 돼. 머리채 잡고 싸워도 돼. 걔가 그냥 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 알아줘도 됨. 이제 다시 시나리오 얘기 좀.
이렇게 이성적인 한 사람의 도움으로 우리 동갑내기 친구들이 우리와 동시대를 살지만 결코 같은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자각한다. 원래 알았어야 하는 걸 굳이 도움을 받아야 깨닫는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알 확률이 없는 세계로,
각자의 방구석으로 다시 글을 쓰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