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시대의) 페미니즘>을 읽고,

*본문에는 다량의 패러디가 담겨있습니다...

by 박수진

“너무 한낮의 혐오

: 정치하게 되는(being) 것과 하는(doing) 것 사이에서”


내게 정치는 언제나 강 건너 불구경 아니 그 근처에도 닿지 않던 주제였다. 스스로 ‘왜 정치에 이리도 무감한 것일까?’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고민을 할 만큼 말이다. 그러다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만났다. 왜 계속해서 ‘여성주의’, ‘페미니즘’에 관한 수업을 쫓아다녔느냐 뒤늦게 회고해 본바 그것이 언제고 내게도 번질 ‘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범죄. 나도 겪어본 차별을 넘어 남성과 여성 간의 날 선 의견 대립 속에서 길을 헤맸다. 무엇이 맞는 것일까. 어떻게 개입할 수 있을까. 이들은 왜 이리 열성적으로 성을 내는 걸까. 하는 물음 속 나는 서서히 정치하는(doing) 주체가 되어갔다.


길지 않은 시간 공부한 페미니즘을 통해 크게 두 가지 변화를 겪었다. 증명과 예민. 더 읽고 배워갈수록 많은 상황 속에 놓였다. 상황을 찾았다는 표현이 더 옳을 수도 있겠다. 전에는 별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던 농담들에 제동이 걸렸다. 예를 들어 친구들이 장난치는 영상을 찍던 나에게 누군가 던진 “몰카네 이거. 너 몰카러냐?”는 우스게 소리나 친구를 함께 만난 애인이 “오늘 나 완전 기쁨조였어” 하는 문장 속에서 멈칫거렸다. 좋은 글이 있다면 늘 SNS에 올리던 나는 언젠가부터 또 멈칫거렸다. 여성, 인권, 동물에 관한 글을 자주 올렸는데 문득 누군가 나를 ‘페미’로 ‘규정’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은 나를 엄청난 ‘페미’로 오해할까봐. 또 혹은 나를 지나치게 날카로운 사람으로 느낄 까봐 걱정이 됐다. 과연 ‘페미의 정도’를 판가름 하는 게 가능할지 의문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랬다. 증명하는 버릇이 생긴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렇게 예민한 건 아니라고, 그렇게 열렬한 건 아니라고. 은연중에 외치고 지난한 자기 검열의 첫 발을 떼었다.


내게 생긴 변화를 인식하게 되자 움츠러듦의 시기가 찾아왔다. 혐오와 차별의 표현 앞에서 분노보다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감싸곤 했다. 며칠 전 홍대의 한 카페에서의 일이다. 검정 정장을 힘껏 차려 입은 남자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카페를 울렸다. 당시 애인은 잠시 화장실에 갔고 나는 그들과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아 그들의 존재를 불편해하고 있었다. “씨발! 시발. 씨이발? 와, 시발?” 하는 말끝마다 마침표처럼 찍히는 욕지거리에 새삼 ‘이리도 당당한 반항아라니 세상 살기 편한 청년들일세’ 하며 구시렁거리던 내게 순간 귀를 의심할 대화가 튀어 올랐다.


“야! 씨발, 요새 출산율이 1%로 아래라며?”

“오 씨이발? 근데 괜찮아 노상관. 어차피 AI, VR로 섹스 먹음 됨”

“와, 시발? 신박한데..?”


와 정말 신박했다. 고개를 돌려 그들을 슬쩍 쳐다봤지만 이내 고개를 떨궜다. 나보다 세 네배는 커 보이는 몸집에 자칫 눈이라도 마주치면 황급히 눈길을 피할 내 시선이 더 괴로웠다. 너무 한낮의 카페에 울려 퍼진 너무 한낮의 비하. 이들을 일반화하고 싶진 않았지만 잠시 난 그 맥락 감춘 대화 속에서 누군가 오랜 시간 싸워온 혐오와 차별 발언의 새싹을 느꼈다. 맞서 싸울 힘과 용기가 없던 그 순간의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뜨거운 공기가 가득 했던 카페의 소음들을 떠올렸다. 그 자리에서 ‘씨이발 그룹’의 대화를 엿들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은 돈을 받고 일하는 건데 왜 고마워해야 하는가. 경비원 아저씨는 경비일을 하는 사람인데 왜 감사의 인사를 덧붙여야 하는 가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에게 예의 없게 굴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하는 것인데 ‘인간성’을 필두로 필요 이상의 씀씀이를 보일 필요가 있을까? 했던 지난날의 나름 철학적 고민을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새 섹스를 꿈꾼 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해소했다. 누구나 자기 안의 ‘소수성’이 있다. 페미니즘은 내 안의 소수성, 여성으로서 겪는 소수성을 꺼내줬고 그 경험이 또 다른 소수자들의 소수성을 이해할 수 있는 연대의 바탕이 돼 줬다.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 역시 크게 보면 여성이 겪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보다 작게는 가지각색의 다양한 소수자 성을 풀어낸다. 여성은 누구이며 여성 주체는 누구인가 묻는 근원적 접근이 있다.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거부에서는 오늘 날의 페미니즘이 ‘평등/자유/정의’라는 개념보다는 여성이 누구인지에 관한 경험을 중시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 중 인상 깊었던 대목은 여성이 ‘무해한 존재’만이 아님을 풀어낸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인가?’ 부분이다.


한 때 백래쉬, 역차별과 같은 단어를 깊게 보며 어느 지점에서는 남성의 불만이 충분히 근거 있는 반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체적 꾸밈과 포스트페미니즘을 회자하는 지금, 남성 꾸밈 역시 남성성 발현이란 측면에서 계속해서 가꿔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이 그토록 각을 세우는 역차별의 논점이 이해되지 않는 것만도 아니었다.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중하자고 하지, 피해자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하지는 않는다”


무조건의 피해자, 덮어두고 소수자가 아닌 합당한 권리 요구하기. 책에서 여러 번 소환되는 주디스 버틀러 혹은 샌드라 하딩이 말하듯 ‘성(sex)이 생물학 혹은 특정 사회 문화적 맥락 안에서 상황적으로 위치된 지식 체계’라는 걸 조금 더 선명히 인식한다면 페미니즘이 꿈꾸는 사회가 한 발짝 빠르게 도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꾸어본다.


‘약자의 얼굴은 얼굴이 아닌 얼굴’이라는 얼굴의 윤리 파트에서도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는 강단 있는 어조를 읽으며 ‘포르노그래피를 소비하는 여성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가’하는 질문에 맞닥뜨렸다. 세계최대 음란물 사이트 포르노허브(pornohub)의 통계에 의하면 2018년 기준 포르노 허브를 방문한 여성 접속자는 29%에 달한다. 일정 부분 여성 또한 포르노 산업을 소비하고 있는 지금 여성의 얼굴만을 약자의 얼굴로 그릴 수 있을까. 물론 여기서 포르노를 유희로 다룰 권력이 여성에게는 부족하다는 항변이 있을 수 있겠다. 대부분의 포르노가 여성 착취적 판타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때 여성의 위치를 보호해야한다는 주장 역시 합당하다.


다만 그래서 ‘포르노 보는 여성’의 존재는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그들의 존재를 어떻게 풀이할 수 있는가 하는 궁금증이 뒤따랐다. 그리하여 나는 ‘나는 나를 정의할 권리가 있다!’는 말로 글을 맺는다. 페미니즘을 만나며 그저 사회적 호명에 따라 되기(being) 만을 반복하는 되던 존재이던 내가 일면 어느 정도의 변화를 마주하고 내 안의 무언가를 발견했듯 앞으로의 페미니즘이 ‘정의’하기의 윤활제가 되길 바란다. 그게 섹스, 젠더를 향하든, 포르노를 소비하는 여성에게 향하든 말이다. 언젠가 여성 금기어인 단어를 꺼내 호탕하고 호방하게 문자를 보내고 싶다. “오랜만이야. 자위들 지내고 있니? 내 자위는 말이야...”


-제목과 마지막 문장은

*김금희 작가님의 <너무 한낮의 연애>(2016)와

**요즘 차애(최애는 내가 진행하는 팟캐 '어우마'...) 팟캐 '비혼세'의 ep45. '자위들 지내고 계십니까'를 가져왔습니다. 두 분 다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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