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읽기

-트레바리 첫 번째 컨퍼런스를 다녀와서, 1편

by 박수진

우리 시대의 읽기. 왜 읽느냐 하면은, 왜 읽어야 하냐면...

살면서 가끔씩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 앞에 서는 순간이 있다. 이를테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빠의 몇몇 엄숙주의 강령이나, 다이어트 압박 풍토처럼 말이다. 어딘가 해석을 위한 방도가 있을 터인데 아무리 찾아도 그 길을 발견할 수 없을 때 답답해진다. 먼 길을 뚫고 화창한 토요일 트레바리 컨퍼런스를 찾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텍스트의 자리는 점점 위태로워진다는데 나는 왜 읽는 것인가, 우리는 왜 읽어야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강연장 맨 앞자리에 짐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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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_윤수영

트레바리의 수장이기도 한 윤수영님은 읽기의 필요성 중 첫 번째 이유를 텍스트가 누군가에겐 아직까지 가장 효율적인 매체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영상은 누구에게나 같은 속도로 소비되지만 글은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존재하고 질과 양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더 깊이 있게 전달된다. 이는 이후 이정무 서울 시립과학관 관장님에 의해서 다시 한 번 언급되는데 아마존의 킨들 서비스나(세 명 이상이 밑줄 친 글에는 표시가 되는 시스템이다) 개인적 단련을 통해 연마된 필요 정보를 선별해 읽는 능력은 책이 가장 속도감 있게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매체임을 뒤받친다.


두 번째 이유는 좀 더 설득력 있다. 불과 4년 전만해도 작은 영세 회사이었던 중국의 텐센트가 현재 자국 내 상장사 시가 총액 1위 기업으로 우뚝 서고 우리나라의 멜론, YG에도 자본력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세상은 갈수록 빠르고 또 복잡하게 변하고 있다. 마땅한 비교대상이 없어 가장 젊은 내가 가장 멋있다고 생각했던 100년 전과 달리 현재는 곳곳에 루저 담론이 판을 치고 2년, 그러니까 강남역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전만해도 땅 밑에 숨겨져 있던 성 차별이 이제 미투, 타임즈업 운동처럼 공공연한 젠더 감수성 공론화로 퍼지고 있다.


그러니까 총알처럼 흐르는 꽈배기처럼 꼬여가는 사회에서 업데이트 되지 않으면, ‘몰라서는 안 되는’ 정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자라온 세상은 그렇지 않았어, 나는 진보주의자야 라는 확증 편향에 빠지다보면 결국 필터버블에 갇혀 도태되고 만다. 윤수영님은 정보 과잉 세상 속에서 적절한 지식을 편식하지 않고 소화해야만 우리가 조금 덜 편협해질 수 있다고 전한다. 가장 생산적인 방법으로 사고를 확장시키는 책을 통해 읽기가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하는지, 과연 읽기란 무엇이고 어떻게 읽어야하는지, 컨퍼런스의 주제와 목표점이 다시 한 번 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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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1 이혜영(북한 인권운동가, 아쇼카 한국대표)

사회 혁신가를 지원하는 아쇼카 단체의 한국 대표 이혜영님은 불필요한 고통을 규모 있게 줄여주는 모델을 사회 혁신가라고 말한다. 전 세계에서 아이를 낳다 죽는 여성이 1년에 50만 명에 이르는데 이를 단지 기술적인측면 뿐만 아니라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시선을 도입했을 때 가치는 배가 된다. 일예로 기아 문제를 식사 전달법이나 정상 체중으로 회복했는지 정도로 파악하는 데에서 벗어나, 아이 엄마의 심리적 문제까지 보살피려 했던 아쇼카 펠로우를 들 수 있다.


그녀는 이러한 혁신법이 문학에서 느끼는 ‘Epiphany’(나는 스탈당 신드롬과 비슷한 느낌으로 해석했다), ‘공감’에서 기원한다고 이야기한다.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모임집 < 더블린 사람들 >을 통해 스스로 규정하지 못했던 감정의 편린을 마주하고, 다니엘 키이츠의 < 일제논에게 꽃을 >, 하퍼 리의 < 앵무새 죽이기 >를 통해 배운 공감의 힘이 Thorikil sonne가 자폐증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회사를 만들어낸 기저의 배경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어딘지 고개는 끄덕여 지지만 의심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소설이나 문학에 빠져 사는 사람들은 다 주도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인가? 돕고 싶어도 어쩐지 화력이, 엔진의 시동이 잘 안 걸릴 때가 많은데, 그렇다면 다른 위대한 봉사자들의 이타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거지? 라는 고민이 꾸물거리고 있을 때 한 참여자가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중요한 것은 나와의 공감이다. 6.25를 겪은 할아버지와 살며 그의 상처를 보며 치유해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무조건 남이 아닌 나를 먼저 이해하고 나를 공감했을 때 우선의 손길이 뒤따른다. 또한 매슬로의 5단계 모형 꼭대기에 있는 자아실현 욕구는 남을 돕고 문제 해결을 이루었을 때 더 만족감 있게 채워진다.” 순수한 마음으로의 다가간다. 늘 가슴 한 편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는데 속 시원한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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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2. 이정모(서울 시립 과학관 관장)

초등학생 때 앞으로나란히가 그렇게 싫었다. 뭔 놈의 조회 시간만 되면 팔 간격대로 각 맞춰 줄을 서야하고 잘 들리지도 않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들으라 하는지 원. 그나마도 발 장난이라도 쳤다하면 그대로 불려나가 혼이 났다. 가뜩이나 정신없는 아니 너무 많은 곳에 정신이 팔려 한 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나이에 운동장 조회는 그래서 끔찍했다.


그럼에도 어렵사리 손에 넣은 ‘개 쩌는’ 연고를 아끼고 아끼다 정작 필요할 때 열어보니 이미 다 썩어버렸다는 훈화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재밌었기 때문이다. 재미가 없으면 기억에서 금세 사라지고, 재밌어야 집중된다는 나의 장대한 깨달음의 첫 사건이었다. 아, 그러니까 이정모님의 강연은 너무 재밌었다는 말이다!


천동설은 과학일까? 라는 시작으로 그것이 어떤 식의 오류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 당시 위대한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불공기흙의 4원소 론이 어떤 파워를 지녔었는지 등을 풀어내며 지동설, 즉 코페루니쿠스와 갈릴레오의 일화를 연결해냈다.


내가 느낀 건 세 가지였다. 첫 째, 과학이 늘 그래왔든 멀리해야만 할 것은 아니라는 사실과(‘과학 지식의 집합일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이다’라는 말이 마음을 움직였다) 둘 째, ‘과학은 의심에 대한 잠정적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라는 이정모님의 문장처럼, 모든 과학적 절차에 정당한 답변을 내놨던 천동설이 결국에는 틀린 정보였지만 과학적이긴 했다는 내 나름의 답변처럼 인생은 살아볼만 한 것이라는 깨달음과 셋 째, 과학처럼 실패를 털고 일어나는 ‘회복 탄력성’의 중요함이었다.


현재 가장 발달된 단계인 알파고 ZERO가 처음으로 스스로 배워 상대와 대결했듯이 이 세상의 지식과 과학은 더 발달되고 있다. 그러니 외우고 공부'만'하라는 엄마 말 듣지 말고, 창의력을 키워보라는 끝까지 유쾌하고 호탕했던 이정모님의 강연은 과학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물론 부딪히며 살아보자는 자기 담력까지 쓰다듬어준 시간이었다.



(신기주님과 강정수님의 강연 정리는 투비컨티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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