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이었다면, ‘하면 된다.’라든지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마지막 남은 한 줄기의 희망’처럼 쓰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도 나는 오늘, ‘하면 된다.’고 말했다.
힘이 빠지는 날일수록, 마치 누군가가 내 인생에 끼어들어 일부러 장난질이라도 놓는 것처럼 하는 일마다 꼬이는 괴팍한 하루일수록, 사춘기 시절로 돌아간 듯 미간에 잔뜩 힘을 주며 외쳤다. ‘하면 된다!’고.
그러나 그건 내가 아직 순수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해봤자 소용없다.’ 거나 ‘꿈은 꿈이다.’는 말들은 유효기간이 짧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일 뿐.
순식간에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합리화로 똘똘 뭉친 말들은 MSG와도 같아서, 먹는 순간에는 행복했지만 결국엔 ‘소화불량’으로 이어졌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기능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듯, 내 소화기관들도 점점 MSG를 소화하기 힘들어했다.
그래서 나는 ‘된다.’고 말하는 쪽으로 ‘타협’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 인생에게 무슨 말이라도 건네며 살아야 한다면,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고 살기에는 삶이 너무나도 길고 지루하기에) ‘된다.’는 말이라도 해보는 게 덜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몇 없는 얄궂은 세상 속에서, ‘된다 치고!’ 한 마디 한다고 혀가 닳아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돌이켜 보면 또 재미있는 게, 그렇게 계속 ‘된다.’고 중얼거리다 보니, 어느 날 시간이 쌓여 자연스럽게 ‘돼야만 하는 순간’이 왔을 때, 인생이 내게 마치 주문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뤘다는 ‘착각’의 선물을 건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신이 내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 손을 잡아주기라도 한 듯 온종일 들떠있었다.
마치 한 달 내내 긁어댄 카드에 쌓인 줄도 몰랐던 포인트를 불쑥, 돌려받는 기분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온전히 순수했던 시절은 어쩔 수 없이 지나가 버렸다. 대신 지금의 나는, 힘 빠지는 말을 뱉는다 하여 일이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새로운 경험치를 얻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무작정 ‘된다!’는 주문을 외운다.
자동이체를 해놓은 채 매 월 잊어버리고 사는 만 원짜리 적금처럼, 언젠가 그 말이 쌓이고 쌓여 정말 중요한 순간에 커다란 선물을 가져다 줄 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