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소리를 내며 셔터가 완전히 올라간다. 차고 문에 가려졌던 아침 햇살이 창문 안으로 들어온다. 셔터를 올린 아빠가 나를 보며 웃는다.
나는 책상에 앉아 아빠를 마주 보며 바깥공기를 깊게 들이마신다. 아빠는 짧은 인사를 남긴 채 대문을 나선다. 대문이 닫히고 나면 책상 위로 널브러진 책들과 메모장들 그리고 출력된 서류더미들을 대강 정리한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조금 돌리면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솟은 책꽂이에 온갖 종류의 책들이 빼곡하게 박혀있다. 어젯밤에 함께 했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제멋대로 꽂혀있는 그들 사이로 삐죽 튀어나와있다. 몸을 오른쪽으로 조금 더 돌려 시선을 뒤로 옮긴다. 김치냉장고 하나, 그 옆으로 커다란 냉장고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건너편에는 2층으로 나눠져 있는 행거에 외투들이 푸짐하게 걸려있다. 그 오른편(다시 말해 책상의 왼쪽)으로 놓인 책꽂이에는, 내가 꼬마였을 때부터 학창 시절을 지나며 읽었던 오래된 책들이 시간의 냄새를 풍기며 가지런히 꽂혀있다. 바닥에는 누군가가 방금 잠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이부자리가 어수선하게 깔려있다.
두 평 남짓한 이곳은 3년 전 이사를 왔을 때 아빠가 차고를 개조해서 만들어준 나만의 작업실이다. 매캐한 먼지를 일으키던 시멘트 바닥에 장판을 깔고 얼룩이 덕지덕지 붙어있던 콘크리트 벽을 회색 페인트로 말끔하게 칠한 뒤 벽을 만들어 창문까지 뚫고 나니 제법 그럴싸한 방 한 칸이 생겨났다.
책상을 들이고 책꽂이를 놓던 날, 이 공간에서 피어날 글들을 떠올리며 가슴 벅차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3년이 지난 지금 이 어수룩한 공간에는 ‘두 권의 수필집과 두 개의 상장’이라는 새 식구가 생겼다. 나는 그들에게 ‘글꽃’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글로 피어난 꽃. 작년 봄에 동화 공모전에서 상을 탄 기념으로 아빠가 만들어준 책꽂이에 걸터앉은 ‘창작 동화제 입선 강송희’ 명찰이 지긋이 건너편 책장을 바라본다. 녀석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 3년 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수필집이 끝자락에 얌전히 꽂혀있다. 문득 연필로 써 내려갔던 문장들이 한 권의 책이 되기까지 고군분투했었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올해 세 살이 된 녀석의 왼편에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 세상에 나온 누군가들의 ‘글꽃’들이 근엄하게 꽂혀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햄릿’,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생텍쥐페리’의 ‘야간 비행’,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마테오 팔코네’, 탈무드, 오발탄,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언제 이 많은 것들이 내 공간에 들어왔나 싶을 만큼 깊숙이도 자리 잡은 그들을 보면 문득 내가 잠든 새벽, ‘저들끼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을까.’ 발칙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올해 상반기에 탄 소설 공모전 상장을 보며 한참 후배 놈이라고 호탕하게 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내 상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그리곤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겠지. ‘당신들 덕분에 내 주인이 나를 세상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
한 줄의 문장에는 여러 개의 단어가 담기고, 한 개의 단어에는 깊은 의미가 스며들어 있다. 그러니 한 편의 이야기와 기나긴 여정을 담은 책 한 권에는 한 번 읽어서는 온전히 다 알아낼 수 없는 삶의 의미들이 종이를 넘길 때마다 켜켜이 배겨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처음에는 글쓴이가 자기만의 작은 공간에서 손가락 끄트머리로 씨앗을 뿌려 조금씩 자라나게 했을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서 정성스럽게. 어쩌면 씨앗이 영영 싹을 틔우지 않아 그대로 포기해버리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또 어쩌면 싹을 틔운 뒤로 더 불안해했을지도 모른다.
애써 세상 밖으로 나온 여리고 어설픈 존재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시들어버리진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그러나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불편한 감정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은 공간 안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내가 온전히 나로 있을 수 있는 공간, ‘나’라는 존재에 대해 사유하고 철학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 그리고 무엇보다 내 손으로 씨앗을 뿌리고 꽃을 피울 수 있는 ‘탄생’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일’에는 고통이 뒤따른다. 무작정 뿌린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을지 꽃을 피워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삽질만 하는 농부의 심정과 별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씨앗을 뿌리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는 비단 글을 쓰고 농사를 짓는 일에만 국한되는 공식은 아닐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문턱이자 채워야 할 첫 단추일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은 어쩌면 가장 위로가 되는 말일지도 모른다.
일단 뿌리고 나면, 수확물이 생긴다는 뜻이니까. 그것이 크든 작든, 무엇인가 한 가지는 손에 쥐게 되는 것이다.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고 늘어져 어질러진 이불 위에 켜켜이 쌓인다. 나는 걸음을 옮겨 이불을 개어 한쪽 귀퉁이에 차곡차곡 쌓는다.
제법 단정해진 방 안을 둘러보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책상 위에 반듯하게 누워있는 수첩이 곤히 잠들어 있는 노트북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의자를 당겨 그들의 앞에 앉는다. 두어 번 손가락 스트레칭을 마친 나는 잠들어있던 노트북의 전원을 켠다.
수첩을 펼치자 새벽녘 끼적거렸던 씨앗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노트북 화면 위로 옮긴다. 하얀 벌판 위에 글자들이 알알이 박혀 들어간다. 그들은 서로의 몸뚱이를 모아 단어를 만들고 또다시 저들끼리 모여 한 문장이 되어 줄기를 이룬다. 점점 자라나던 줄기는 이윽고 싹을 틔우더니 꽃 봉오리를 맺는다.
나는 여기서 손가락을 멈춘다. 꽃을 피우기 직전의 순간, 지금껏 뿌려온 씨앗들을 돌아본다. 제때 물을 주었는지, 햇볕은 충분히 쏘였는지 자꾸만 들여다본다. 한참 꽃 봉오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이내 한숨을 고른 후 다시 손가락을 움직인다. 손가락 끄트머리에서 봉우리가 천천히 입을 벌린다. 어느새 내 손을 떠난 글자들이 마침내 활짝 꽃을 피운다.
끼익-철컹. 끼익-철컹.
기분 좋은 봄바람이 차고의 문을 간질인다. 흔들리는 문을 따라 지금 막 피어난 꽃이 하늘하늘 춤을 춘다. 나는 잠시 그대로 의자에 기대 눈을 감는다. 평온한 마음이 차고 안 가득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