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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수꾼 Aug 12. 2020

< 나중 >

2020. 6. 15. D-200

살랑살랑~ 산책로를 따라 부는 초여름 바람에서 ‘자식 얘기’가 흘러나왔다. 어느새 매일같이 빠지지 않고 만나는 녀석이었다. 


“뚱이는 지금 장기가 배 밖으로 튀어나와 있대.”

“응? 뚱이 생각을 너무 안 하는 거 아냐?”

“무슨 소리야? 하양이(임신 관련 전문 서적)에서 그렇게 봤어. 장기가 다 튀어나와 있대.”

“너무 이기적인 관찰 결과잖아. 아직 뱃가죽이 다 안 생긴 거 아니고? 최초에 세포가 두 개로 분할했을 때를 상상해봐. 그 이후도. 장기가 배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는 시선은 너무 자기중심적인 것 같아. 쯧쯧쯧... 엄마가 그렇게 하게 돼 있나?”


심지어 엄마라는 존재도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엄마까지 이 정도라면 세상 사람들 중에 자기중심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앞선 길에서 마주했던 엄마들 중에는 ‘헌신’의 탈을 쓰고는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 이틀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 날은 살랑바람의 끝자락을 붙잡았었다.


“뚱이에게 뭐든 요구하는 것은 ‘틀린’ 거야. 애한테 자기 욕심을 꾸역꾸역 넣는 거지.”

“맞아. 그냥 뚱이 하고 싶은 대로 살게 놔둬야 해. 나한테 하는 것처럼 ‘조건’ 같은 거 붙이지 말고.” 아내는 고개를 꿀벌 날개처럼 좌우로 흔들며 ‘조건’이라는 글자를 특히 또박또박 말했다. 내 쪽 어깨를 살짝 올리며 윗입술을 코끝으로 한껏 끌어올리곤 코 평수를 동전만큼 넓힌 표정이었다. 

“ㅋㅋㅋ. 근데 사실 벌써부터 ‘어땠으면 좋겠다.’ 이런 상상은 하는 거 같아. 욕심쟁이라서.”

“그러다 한석봉 엄마처럼 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걸 내세우면서 그게 자식을 위한 ‘헌신’인 것처럼 아이의 정서를 짓누를 수 있다고. 자기는 하지도 못하는 일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건 학대라고 생각해.”


초여름 바람의 꼬리는 이처럼 세차다. 반박하지 못했다. 그냥 맞장구쳤다.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며 뚱이의 앞날을 생각해 봤다. 뚱이가 자아를 찾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마주하게 될 질문은 “나중에 커서 뭐 되고 싶니?”일 것 같았다. 나중. 그러고 보니 나중이란 단어는 참으로 솔직한 것 같았다. ‘나 중심’의 줄임말이니 말이다. 나중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경우를 생각해보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커서 뭐 되고 싶니?” 질문하는 자는 일방적으로 미래를 생각하도록 강요한다. 아이가 어떤 대답을 하던 할 말은 정해져 있다. 정작 자신을 뱉고 있는 말대로 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떡만 썰 줄 아는 존재가 ‘헌신’을 무기로 강요하고 짓누르는 것과 꼭 같다.


“나중에 식사 한 번 해요.” 지금은 싫다. 너 말고 다른 사람과 선약이 있어서, 몸이 안 좋아서, 밤이 늦어서, 거리가 멀어서, 그냥 싫어서 식사하고 싶지 않은 거다. 더 이상 말조차 섞고 싶지 않으나, 당신이 나를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게 마지막 모습만이라도 억지로 좋게 포장하는 내 욕심으로 하는 말이다.


“나중에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하기 싫다. 안 하고 싶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게 아니다. 이 일도 하기 바쁘니 더 이상 말 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다. 다만 관심은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들 하니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긴 어미로 문장을 끝내주는 아량을 베풀겠다.


“나중에 꼭 해줄게. 약속.” 잊어라. 망각은 신의 선물이다. 해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행여 네가 기억한다고 해도 나는 잊을 거다. 심지어 네가 자식이어도 나는 신의 선물을 누리겠다. 다만 너는 진실을 말하는 아이임에 분명하지만 내가 기억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 “진짜? 전혀 기억 안 나. 벌써 늙었나 봐. 미안해. 나이가 들어서 깜빡깜빡하네. 우선 지금은 안 되니 조금만 두고 보자.”라며 안타까운 표정을 뽑아낼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요구받으면 “쓰~ 두고 보자고 했지. 너도 알잖아. 아빠(또는 엄마) 그런 사람 아니야. 지난번 그것도 봐봐. 결국 다 해주잖아. 아빠(또는 엄마)는 널 위해 뭐든지 해줄 수 있어.”라며 깔보고 구박하고 무시하고 기만하고 업신여기고 홀대하고 괄시하고 냉대하고 박대하고 천시하고 천대하고 멸시하고 푸대접하겠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아내에게 금기어로 ‘나중’을 제시했다. 지금부터 연습이 필요했다. 어차피 자기중심적이겠지만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다. 위협, 학대를 할 순 없기 때문이다.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황금, 소금보다 더 귀중해 돈으로도 살 수 없다는 지금을 강조하는 것과는 결이 약간 달랐다. ‘나중’을 회피한다고 해서 뭐든 ‘지금’을 강조하려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나중’을 핑계로 다른 이에게, 특히 뚱이에게 부정적인 정서를 옮기고 싶지 않으려는 것뿐 이다. 그래서 거창하지 않았다. 그냥 ‘나중’이란 말만 빼기로 했다. 


“설거지 거리가 너무 많네. 내가 나중에 할게. 아니다, 퇴근하고 할게.”

“하아, 저 책 나중에 입덧 좀 괜찮아지면 읽을 거야. 아니다, 16주 차부터 읽어 볼래.”

“나중에 대학원 갈 거야. 아니다, 다음 달 영어시험 신청하자. 영어 점수 필요해.” 


효과는 생각보다 뚜렷했다. 불확실성이 줄어들었다. 계획성이 부각됐다. 서로에게 약속으로 다가왔고, 삶의 과제가 명확해졌으며, 응원과 격려가 늘었다. 뚱이의 요구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양이와 한석봉 어머니, 그리고 살랑바람이 준 가르침이었다.


이렇게 ‘나중’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사라질 줄 알았다.

“나 포르셰 SUV 언제 사줄 거야? 연애 때부터 사주기로 했었잖아. 중고도 좋아.” 

“나중에.” 날카롭다. 세차다. 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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