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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수꾼 Aug 12. 2020

< 본능 >

2020. 6. 11. D-204

여느 때처럼 출근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휴대전화를 꺼내 아내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녹색(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일시정지 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반짝거리며 움직이기까지 했다. 잠자리였다. 얼굴을 비롯해 온 몸이 까만데, 꼬리 부분 일부만 샛노랬다. 이전에 본 적 없는 패션이었다. 눈 평수가 넓어지는 게 느껴졌고 눈코 입이 잠자리에게로 쏠렸다. 보색 대비가 이보다 더 뚜렷할 순 없어 보였다. 한 밤 중에 가로등이 없는 도로를 운전하다가 노란 신호등을 만난 듯했다. 오징어 먹물 식빵에 체다 치즈가 삐져나온 듯했다. 바닥 색 때문인지 노란 부분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명쾌한 노란빛은 처음이었다. 아직 학계에 보고가 되지 않은 잠자리 종이라면 ‘발광(發光) 잠자리’라고 명명하면 딱이다 싶었다. 예뻤다.


움직임은 낯설었다. 좌우로 조금씩 움직이며 화단 쪽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아마추어 사이클 선수가 자전거를 끌고 대관령을 오를 때의 모습 같았다. 페루에서 만난, 무거운 짐을 외바퀴 수레에 올리곤 좌우로 흔들며 최대 정지 마찰력을 극복하려 애쓰는 수레꾼의 궤도와 비슷했다. 어딘가 불편해 휴식처를 찾아가듯, 아니면 삶의 마지막 장소를 스스로 결정하려는 듯 젖 먹던 힘까지 다하는 모습으로 느껴졌다. 조심히 옮겨줄까 하는 오지랖에 좀 더 가까이 갔다.



개미다. 엥? 개미가 있네. 개미가 잠자리와 뽀뽀하듯 마주 보고 있었다. 최대 정지 마찰력을 극복하려 애쓰는 건 잠자리가 아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있었는지도 모를, 잠자리의 다른 부분보다 검지도 않은 작은 개미였다. 언뜻 봐도 본인 몸의 부피에 30배 정도, 길이만 열 배 남짓 돼 보이는 잠자리를 끌고 가고 있었다. 개미의 다리가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잠자리가 딱 개미 보폭만큼 화단으로 향했다. 최단거리로 가는 건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좌우로 조금씩 움직이며 차분히 나아갔다, 아니 당겨갔다. 딱 ‘고만큼’씩 갔다.


하긴, 생각해보니 잠자리가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잠자리에게 다리란 그저 안전한 착지, 먹잇감 포박, 날개를 포개 잡고 얼굴에 손을 대려는 사람들에게 뽐내는 생명력 정도의 용도일 뿐이 아닌가. 자기 몸보다 넓은 날개가 있는 덕에 쪼잔한 걸음 따윈 사뿐히 제쳐두는 게 잠자리지 않은가. 바닥을 기어간다는 생각은 대충 보고 넘겨짚은 자만심 가득한 허세였다.


허세를 보인 나를 비웃듯, 개미는 쪼잔하지 않은 걸음을 이어갔다. 길을 나설 때부터 정한 목표를 향해 매 순간 보폭만큼 밟아 나갔다. 바로 뒤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상관없다는 듯, 얼마나 남았는지 고개를 돌려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듯 좌우로 흔들리긴 하지만, 그래도 약간 멀리서 보면 자기 몸보다 짧은 너비의 한 줄 직선을 그려 나갔다. 발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온몸을 파르르 떠는 것을 보니, 정말이지 젖 먹던 힘까지 다하는 듯 느껴졌다. 


‘발광 잠자리’도 그렇지만, 변변찮아 보이는 개미의 ‘젖 먹던 힘’에 매료돼 급히 까만 배경의 녹색 버튼의 창을 사진 어플을 켰다. 앞뒤 좌우 여러 장 찍고 싶었지만 이미 출근버스의 문이 열려 있어 간신히 딱 한 장 건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비슷한 힘을 발휘했던 적이 있다. 정확히는 그랬었다고 들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모유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던 시절, 한 방울이라도 더 먹기 위해 발까지 동원해 엄마의 가슴을 꾹꾹 눌렀다고 한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짠 것이다. 목표를 정하곤,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는 담백하지만 굳건한 노력이었다. 다른 생각은 어떤 것도 없었던 것 같다. (아마 못했을 것 같다. 왜? 그거 말곤 아는 게 없지 않았을까?)


차창에 미소가 반사됐다. 뿌듯했다. 방금 본 그 개미와 같은 신념을 지닌 때가, 목표를 정하고 그렇게 담백하게 나아갔던 적이, 내게도 있었다. 목표 성취의 어려운 정도, 크기, 길이, 시간 등 제반 조건들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누가 뭐라 하든, 어떤 상황에 직면하든 계산하지 않았다. 모유가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한결같은 젖 먹는 능력을 발휘했고, 그렇게 성장했다. 


나이가 들수록, 아는 게 많아질수록, 일단 멈추곤, 뒤를 돌아보는 횟수도 정비례해 늘어난 것 같다. 목표를 세우기도 전부터 스스로 노란빛을 찾아 밝히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가 얼마나 힘든 지부터 따지고, 누가 뭐라고 할까 두려워 ‘그냥 하는 말’이라며 온갖 ‘밑밥’을 깔아 댔던 것 같다. 스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실상은 짧은 보폭도 딛지 않아 필요도 없을 두려움과 투덜거림만 잔뜩 선보였던 때가 있었다. 겁먹고 머뭇거렸다. 그리곤 ‘합리적’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이내 만족했다.


‘발광 잠자리’가 예뻐 보였던 것은 강박이 만들어 낸 착각이었을지 모른다. '지금의 내 모습과 유사할수록 더 예뻐야만 한다.'는 셀프 강요가 있었던 것이다. 학업, 회사, 투자 등 산재해 있는 과제들에 대해 ‘발광 잠자리’의 빛나는 곳과 같은 빛깔의 버튼만 누르곤 ‘합리적’이라고 치장하지 않았던가. 스스로 위로하며, 그런 상황이 정당해야 한다는 헛된 염원만 소원한 건 아닌가 싶다. 


태초에 나의 본능은 어떻게 보이든, 설령 보이지 않아도 목표를 향해 발을 딛는 개미에 가까웠다.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태초부터 지니고 있었다. 보폭의 너비가 어떠했든 개미는 결국 화단으로 갔을 것이고, 그처럼 아가였던 나는 이렇게 컸다. 그리고 많진 않지만, 또한 내세울 정도는 아니지만 끝내 성취한 목표들도 있다. 아직 삶의 절반도 살지 않은 지금, 여전히 충실해야 하는 것은 본능이고, 개미와 같은 능력을 다시 발현할 필요가 있는 지금이다. 인풋 대비 아웃풋을 따지기 보단 필요 여부만 따져 내딛고 싶어 졌다.


본능과 태초의 능력이 출중할 새 생명이 태어나기 전, 나의 그것들까지 일깨워 준 개미에게 감사하다. 적어도 새 생명의 노력에 발을 맞출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아, 그리고 정성을 담아 준비해야 할 물건이 하나 생겼다. 배냇저고리. 곧 태어날 새 생명이 일생일대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본능과 태초의 능력까지 일깨워야 할 필수템이기 때문이다. 


퇴근 버스에 올라 아내에게 필수템을 발견한 것을 뽐내기라도 하듯 늘어지게 포부를 밝혔다.


“배냇저고리는 새 거로 사야겠어. 그래도 처음 입는 옷인데 예쁘고 부드러워야 해. 이왕이면 옷고름도 있는 거로다가” “웅웅ㅎㅎ” 

명료했다. 계산과 두려움 없는 담백한 대답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본능에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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