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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수꾼 Aug 12. 2020

< 당근 >

2020. 6. 28. D-187

선무당이 될 때가 있다.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았으면서 팔자가 어쩌고 할 때가 그렇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다가 상대의 반응이 좋기라도 하면 굿판이 벌어진다.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오락기 코인이 올라가듯 목소리는 경쾌해진다. 한껏 분위기가 고조돼 방언 터지듯 말을 뱉어낸다. 모두가 진지하기 그지없는 상황인데도, 나중에 떠올리면 웃음만 난다. 내 팔자엔 분수를 제 때 깨닫는 날이 오기는 할까?


팔자가 어쩌고 하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기혼 남성들 중에는 아내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분들이 많다. 주로 결핍을 이야기한다. 채워주길 원하는데 되레 빼앗아 간다는 것이다. 물질의 문제가 아니다. 마음이다. 팔자를 보면 결핍이 보인다. 당연하다. 그 어떤 인간도 전부를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팔자를 구성할 수 있는 22개 글자 중 많아봤자 기껏 8글자다. 결핍은 필연적이라고 보는 편이 낫다. 이 대원칙을 전제로 각기 다른 팔자에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끼워 맞춘다. 하지만 결론짓는 대답은 늘 비슷하다. 본인의 결핍을 받아들이라는 것.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짜증내고 투덜대고. 애들만 다 크면 다른 여자랑 살고 싶어요.”

“사모님이 삐져있고 짜증내고 화낼 때는 아무 말씀하지 마시고 그냥 집을 나가버리세요. 그런데 웃는다, 그럼 무한정으로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잘해주세요.”

“그냥 집을 나가버리면 더 화낼 텐데요?”

“웃을 때까지 계속 나가세요. 안 그러면 (부정적인 상황이) 안 끝나요.”

“네, 해볼게요.”

“그리고 사모님이 힘들게 하는 게 아니라, 선생님께서 태어나실 때 아내 분 때문에 힘들 팔자로 태어나신 거예요. 그러니 아내 분 탓을 하는 건 방귀 뀌고 성내시는 거예요.”

“궁합이 안 맞는 게 아니고요?”

“네, 선생님 팔자는 어쩌고저쩌고 해서(창작의 고통은 사실상 없다. 이미 상대가 나를 믿고 있으므로!) 사모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어요. 본인 팔자라 누굴 만나도 똑같았어요. 그러니 부정적인 상황이 오면 ‘그런가 보다’하고 나가셨다가 웃을 때 무한정 잘해주세요.”


잠들기 전 하루의 일과를 공유하며 이러한 이야기를 하자, 아내는 강력하게 반박했다.

“그렇게 얘기하면 상황만 더 악화되지. 그렇게 하면 안 돼. 정정해줘.”

“응? 무슨 말이야? 어디가 잘못됐다는 거야? 그냥 ‘안 맞으니 이혼하세요.’라고 해?”

“아니 바보 똥구멍아, 그냥 나가버리면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겠어. 여보 말처럼 되려면 순서를 바꿔야 해. 남편이 나갔을 때 여자 스스로도 생각할 수 있는 사전 경험이 필요하다고.”

“굽신굽신, 더 설명해줘 봐.”

“‘웃는다, 그럼 최선을 대해 잘해주세요.’가 먼저여야 해. 그래야 부정적인 상황에서 남편이 나갔을 때, ‘남편이 왜 저랬는지’, ‘본인이 어떻게 했을 때 잘했는지’까지 떠올릴 수 있다고. 이런 경험은 없이 무작정 나가버리는 게 먼저면 오히려 여자 마음이 더욱 부정적으로 바뀌어서 상황이 악화될 수 있어. 누구든 부부 사이는 좋고 싶어. 아내도 마찬가지라고.”


아, 순서의 문제였다. 양극단의 상황에서 각각 극단적 반응을 보여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떤 경험을 먼저 하게 하느냐는 것이 더 중요했다. 좋았던 기억이 없다면 굳이 웃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나 같아도 그럴 것 같았고 지금까지 그래 왔다. 특히 어른이 되기 전에는 유사한 상황에 더 자주 직면했었다.


어린 시절, “손을 씻고 와야 치킨을 먹을 수 있다.”, “숙제를 끝마쳐야 TV 프로그램을 볼 수 있다.” 등등의 상황에서 조건 행위보다는 결과 행위 쪽으로 인식이 치우치곤 했다. 치킨이 얼마나 맛있는지, TV 프로그램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앞서 경험한 덕분이었다. 목표를 특정 행위를 할 수 있는 상황으로 설정하고 나면, 조건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 명료했다. 직진.


결과의 성격이 다른 경우에도 직진한 적은 있다. 이 또한 앞선 경험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혼난다, 빨리 가서 손 씻고 와!”, “몽둥이 어디 있어, 빨리 숙제하러 가지 않으면 매 맞는다.” 등의 상황에서 그랬다. 혼나거나 매 맞는 경험은 생각만 해도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했고, 이를 피하기 위해 원하지 않더라도 특정 행위를 했다.


위의 어떤 상황의 행위든 경험을 전제로 한다. 경험 당시의 느낌이 기억으로 남아 행동 여부를 결정한다. 결과 값은 같았지만 항상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전자의 경우 능동적으로, 후자의 경우 강압에 의해 선택했다고 느낄지 모른다. 역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더 쉽다. 전자의 경우 누군가 치킨을 먹거나 TV 프로그램을 먹는 행위에 대해 지적하면, 당사자는 손을 씻었다거나 숙제를 끝마쳤다며 논박할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네가 하라며’라고 책임을 지우며 규탄할 것이다.


뚱이가 오고 있어 그런지 새삼 진지해진다. 앞서 어떤 경험을 하게 하느냐가 뚱이의 생각을 바꾸고, 그로 말미암아 삶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생각하기엔 맛나고 재미있는 경험이 두려움이나 공포보다 나을 것 같긴 하다. 그렇다고 불이 나거나 사건 현장에서 긍정적인 생각만 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평소에는, 긍정적인 경험을 떠오르게 하는 조건의 상황만 골라 직면케 할 수는 있을 거 같다.


채찍보다는 당근을 주는 연습을 해야겠다. 일단 엄마를 상대로 시도해야지. 아, 엄마를 닮아서 당근을 채찍만큼 싫어한다면 치킨을 주면 될 것 같다.


“그러네, 먼저 웃는 상황을 경험하게 해야 하는구나.”

“내가 경험자잖아. 가서 다시 정정해줘.”

“장난 아니다. 엄청 똑똑하네, 연데네(아내의 별명).”

“나 똑똑해졌다. 까불지 마라.”

“근데 당근 좋아해? 아니면 치킨을 더 좋아해?”

“치킨”

“치킨이 더 좋아?”

“당근, 치킨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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