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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수꾼 Aug 12. 2020

< 칭얼 >

2020. 7. 9. D-176

“뚱이는 참 운이 좋은 아이야. 때마침 자기 먹을 밥그릇 챙겨서 나오니까. (도전한 일의) 성과가 나오는 시점에 딱 태어나니 좋지 뭐야.”

“그거 뚱이 거야?”

“나 출산휴가+육아휴직 들어가면 우리 벌이가 현저하게 줄잖아. 그걸 좀 메워줄 수 있으니 다행이지 뭐야. 뚱이는 복 있는 아이야.”

“그거 투자하고 지키는데 우리가 고생했는데 왜 뚱이 거야? 뚱이는 자기 밥그릇 알아서 챙겨 오겠지. 난 싫어. 우리 거 할래.”

“ㅎㅎㅎ, 알겠어. 그럼 다 자기 거 해.”

“뭐야, 포기하는 거야? 그냥 내 마음대로 해?”

“응응, 난 이제 내려놓았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


아내가 바뀌고 있다. 싫고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난다. 자다가 일어나서는 벽을 잡고 한 참을 서 있는다거나, 머리칼 빛깔이 밝아지고 있다거나, 같은 옷을 며칠간 입는다거나. 이런 외향적인 모습보다 더 확연한 징후는 따로 있다. 몸이 불편하거나 마음에 못마땅하여 짜증을 내며 자꾸 중얼거리거나 보채는 행동, 즉 칭얼거림이 사라지고 있다. 연애 때부터 결혼한 뒤에도 아내는 자주 칭얼거렸다. 몸이 불편하고 아프다는 이유도 있었고, 늦잠을 자고 싶다는, TV나 휴대전화를 보면서 가만히 누운 채로 쉬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다. 때마다 ‘게으르다’며 잔소리하는 내게 아내는 더 많이 칭얼거렸고, 때론 다소 격한 싸움으로 발전(?) 하기도 했다. 이외의 싸움의 원인은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칭얼거림’은 아내의 천성과도 같았다.


뚱이가 생긴 이후, 아내의 ‘칭얼거림’은 현저히 줄었다. 넘겨짚거나 투덜대거나 짜증 내지 않는다. 보통의 연인이라면, 신혼부부 사이라면 온당 있어야 할 것이 소멸하고 있는 듯하다. 아내는 남편에게 칭얼거리는 건 8시간을 굶으면 배가 고픈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편하지 않은 상황에서 온전히 자기편에게만 비로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어진다는 것은 내가 더 이상 자기편이 아니거나, 반대로 불편할 게 하나 없이 완벽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로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설거지 횟수를 늘리지도 않았다. 아니면 체념한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 대한 아내의 시선, 말투, 행동은 오히려 부드러워졌고, 또 사랑스러웠다. 그렇다면? 엄마는 아들에게 칭얼거리지 않는다. 아내는 엄마가 되고 있다.


뚱이의 존재를 인식하자마자 돌변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은은하고 차분하게 변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변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내가 엄마가 되는 게 싫다. 무섭고 두렵다. 항상 같은 모습으로 곁을 지켜주길 바라며 결혼을 결심했었다. 그때, 그 모습의 아내를 붙잡고 평생 함께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칭얼거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아내의 환경도 싫다. 나보다 어릴 때, 아내는 엄마를 보냈다. ‘투정 받이’인 엄마의 상실은 쓸쓸함과 씁쓸함을 동반한다. 그렇게 아내는 내 곁으로 왔었다. 그리고 나를 (충분하진 않지만) ‘투정 받이’로 삼고 칭얼거리면서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이 모습 또한 갑작스레 되찾은 것은 아니어서 ‘아! 이게 본래의 모습이구나!’며 느낀 때도 석 달이 채 되지 않았다. 거의 2년이 걸려 찾은 모습이었다. 어여뻤다. 그런데 그런 아내가 다시 또 본연의 모습을 읽고 있다. 그녀의 말처럼 내려놓고 있다. 어여쁜 모습을 다시 또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싫다. 영원히 볼 수 없을까 무섭고 두렵다.


문득, 모든 게 자신의 탓인 양, 알아도 모르는 척하며 사는 세상 엄마들의 전형이 떠올랐다. 태교를 제대로 안 해서, 잘못 키워서, 벌이가 시원치 않아서 등 모든 잘못된 일의 원인으로 스스로를 지목하는 엄마의 모습이다. ‘자책하는 엄마’는 촌스러운 신파의 소재겠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눈물을 쏟게 하는 마법 같은 이야기의 재료다.


여자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딸이 숙녀가 되고 아내를 거쳐 어머니가 돼가는 과정은 전 세계 30억 명이 겪는 보편적이고 흔한 일일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것을 피하게 할 재주는 없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어, 추구하기로 했다. 아내가 자신의 것을 뚱이에게 내어주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전부 소진하지 않도록 늘 살펴보며 미약하게나마 채워나갈 수는 있을 것 같다. 욕심일 수 있겠지만, 아내가 자신의 것을 스스로 정하고 놓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응당 자신의 것임에도 뚱이의 밥그릇이라 내어놓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며칠을 끙끙거리다가, 칭얼거림을 유도하려고 괴롭혀보기도, 먼저 토라지고 했다. 그래도 본연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아내의 모습에 출퇴근 버스에서 찔끔거리기도 했다. 답답함에 서서히 다가가지 못하고 결국 부딪혔다.

“요즘 연진이 칭얼거리는 게 사라졌어. 다시 칭얼거리면 안 돼?”

“그럼 자기 또 집 나갈 거잖아.”

“그래도 칭얼거렸으면 좋겠어. 그게 더 좋을 거 같아.”

“나 칭얼거려도 집 안 나갈 거야? 완전 내 위주로 해도?”

“그건 안 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칭얼거렸으면 좋겠어).”

“그래? 그럼 나 이제 ‘칭진(칭얼 연진)’한다. 협조해.”

아내는 최신식 무기를 확보했다. 적어도 나의 무기가 생기기 전까지는, 불편한 상황에서 아내가 내세우는 뚜렷한 명분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못마땅할 때가 많겠지만, 안도감은 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눈을 뜨자마자 선포를 한다.

“나 ‘칭진’이야! 칭얼거릴 거야. 나 가만히 누워서 쉬고 싶어 건드리지 마. TV로 예능도 보고, 아이패드로 드라마도 볼 거야.”

“알았어...(휴, 참자. 무덤은 내가 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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