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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수꾼 Aug 12. 2020

< 교훈 >

2020. 7. 10. D-175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한 일이 있고, 묵혀야 이로운 일이 있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지 마라. 말할까 말까 할 때는 말하지 마라. 줄까 말까 할 때는 줘라. 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지 마라.’는 인생 교훈에서 알 수 있듯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이 또한 정답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살까 말까 할 때 사는 게 이득일 때도 있다. 전염병이 확산할 수 있다는 경고가 있다면 경고가 현실이 될 것이란 구체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마스크는 응당 미리 구매해두어야 한다. 줄까 말까 할 때 주지 않는 것이 이로울 수도 있다. 투자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병을 조기에 치료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를 맹신하기보다는 축적된 경험이 집약된 약을 먹는 편이 낫다. 이와 유사하게 저승으로 갈까 말까 할 때는 가지 않는 게 마땅하고, 성추행을 멈추라고 말할까 말까 할 때는 즉시 말하는 게 합당하다.


때문에 우리나라 최고 대학의 교수들 중 대표 격이 건넸다는 저 교훈만 으뜸 삼아 살아간다면 상식적이지 않은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피해자가 가해자로 여겨진다거나, 가해자의 공만 치켜세우는 조직적 야합이 팽배한다든가 등이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가 비서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비서가 수사기관에 고소하자 상사가 저승으로 간 경우, 비서는 가해자로 지목받는다. 혐의는 심지어 ‘살인’이다. 해명이라도 할라치면 ‘사자명예훼손’까지 덮어 씌우려 한다. 구체적으로 보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먼저, 살인 및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받게 된 비서에 대한 인민재판이 시작된다. ‘꽃뱀’이니, ‘반대파에 동조’한다느니,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서 그런다’느니 하는 상투적인 프레임이 붙는다. 제대로 변명이라도 하려면 모든 인민 앞에 본인을 드러내야 하고, 그럼에도 ‘사람 볼 줄 안다’고 자부하는 인민들에 의해 입막음당한다.


둘째, 사회성을 상실한다. 가해자로 지목된 비서는 인민들에 의해 색출되고, 사회생활이 사실상 불가능한 지경으로 유명해진다. 특히나 대표의 측근이라는 특성상 이미 집단 내 주목을 받아왔을 터라 방어권을 포기하고 본인을 드러내지 않는다 해도 ‘신상 털기’를 피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셋째, 그 어떤 피해보상도 받지 못한다. 보상을 위해선 피해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사실을 확인하는 권한은 사법부에만 있는 사회 시스템인 데다가, 쌍방이 모두 존재해야 사법부가 사실 확인 절차를 진행한다는 점에서 피해가 아무리 뚜렷한들 대표가 존재하지 않는 한 사실로 인정받을 수 없다. 당연히 법적 피해보상도 불가하다.


넷째, 유사한 사건 발생 시 가해자가 ‘살인’을 앞세워 피해자를 협박할 수 있다. 신고하거나 처벌받게 되면 죽어버리겠다는 말로 피해자를 입막음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앞선 인민재판 사례들을 들먹일 것이다. 결국 피해자가 침묵을 강요받게 되고, 어떠한 피해보상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성폭력에 노출될 수도 있다.


먼 나라, 다른 동네 문제가 아니다. 우리 주변 곳곳에까지 스며든 일상적 이야기다. 잇따라 발생한 지자체장의 성폭력 사건들 중 비서가 먼저 용기를 내 인민 앞에 선 사건에 대해 ‘비서가 지자체장을 존경하다 못해 사랑해 잠자리를 한 것’이라며 피해자를 가해자로 지목하는 인민의 판결이 우리 집 명절 차례상 위까지 덮칠 정도니 말이다. 소리를 꽥 질러도 재판관들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었다. ‘책을 많이 읽었다.’ 또는 ‘배울 만큼 배웠다.’로 자신을 소개하는 인민들이었다.


뚱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다. 심지어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만날 사람들의 인식이다. 숙녀인 뚱이가 직·간접적으로 유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은 상당하다고 봄이 타당하다. 이런 상황 없이 삶을 마친다면 오히려 ‘운수대통’이라는 평가를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세상 인민의 생각을 바꾸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가족조차도 인식의 변화를 기대하긴 어렵다. 뚱이가 마주해야 할 상황은 복잡하다. 학교에서는 이차방정식까지만 배운다. 삼차 이상의 n차 방정식, 즉 여러 입장이 얽히고설킨 상황에서라면 공황을 느끼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어쩌면 가해자의 권력에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다. 권력에 의한 자진(自盡)은 개가 사람을 물었다는 사건만큼 곁에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뚱이는 홀로 우뚝 서야 한다. ‘갈지 말지, 살지 말지, 말할지 말지, 줄지 말지, 먹을지 말지’ 때마다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본인의 이익과 손해를 따질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까지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내 행동하는 능력과 다양한 상황에 맞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조차도 어떻게 해야 그러한 능력을 키우고 연습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다만 여행과 독서가 도움이 된다는 정도만 들은 적 있다.


“저 비서가 성추행을 거부하는 의사를 즉각적으로 강력하게 밝혔다면 두 사람 모두 살 수 있었을까?”

“그렇게만 생각하면 안 될 거 같아. 비서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게 잘못이라는 거잖아. 그조차도 가정일 뿐이니까.”

“그럼 뚱이에게 그런 피해가 없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잘 모르지. 근데 일단 걷고 말하기 시작하면 호주 친구, 캐나다 친구, 유럽 친구 다 만나러 다니게. 그게 다 훈련이 될 거야. 허락해줄 거지?”


아내는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다. 정말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대충 수습하고 나중에 딴소리하는 게 상책일 듯싶다.


“좋아, 알겠어. 나는 그럼 집에 있을 때 같이 책 읽어야겠다. ㅅㅈㅇ(친구) 말처럼 독서가 습관이기보다는 쾌락이 되면 가장 좋을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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