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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수꾼 Aug 12. 2020

< 무사 >

2020. 6. 1. D-214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어서”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 등장하는 무사(武士)들의 공통된,

시선을 마음에만 둔 채 침묵 끝에 내뱉던,

어떠한 행동을 했든 무엇을 계획했든 이유로 내세웠던,

스스로 정당화하듯 그리고 위로하듯 완성하지 않은 채 끝맺던 대사였다.


퇴근 후, 가방이 자유 낙하한 뒤, 등에 붙은 셔츠를 뒤 앞으로 펄럭이면서 집을 휘~ 둘러봤다.

아내의 입덧이 심한 탓에 집안일을 독점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한 과시적 행동이었다.

인사치레로 하는, 의도가 없는 질문. 

‘나중에 식사 한 번 하시죠.’와 함께 무의미한 대화의 처음과 끝을 담당하는,

눈을 마주칠 필요 없이 그냥 건네는,

‘응‘이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 뻔한, 또는 대답이 없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각종 맛이 뒤엉킨 입 안을 헹구는 마지막 생수 한 컵 같은 담백하고 깔끔한 다섯 글자의 질문을 내뱉었다.

“별 일 없었지?”


이틀간 온·오프라인 전투를 지속하다 출근 7시간 전에 극적(?)으로 일단락했다. 호텔로 자리를 옮기곤 배를 움켜쥐고 누워있는 아내에게 2번이나 짜증을 낸 후였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아랫집 측에서 먼저 호텔로 피신할 것을 제안해 비교적 수월하게 끝날 줄 알았다. 사정을 고려해 1박 10만 원 선에서 마무리할 요량이었고, 추가로 발생할 Late check-out 등의 비용은 부담할 생각이었다. 


아무 일도 아닐 것 같았던 일(無事)이 파워게임(武事)으로 바뀐 것은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어서’라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감정 변화도 한몫했다. 애초엔 ‘경사가 있을 때 특히 더 조심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되뇌면서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양해를 구했었다. 상황을 이해한다는 상대방에게 최소한의 조치만 해주면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의견을 수차례 전달했다. 행여 상대방의 기분이 상해 번거로움이 발생하진 않을까 걱정하며 살얼음판을 걷듯 입을 뗐다. 


어른들의 말씀과 현실 간 온도차는 확연했다. 인근 비즈니스호텔은 무리한 요구였고 상대방 내외는 씰룩거리는 표정과 평양을 향하는 눈짓으로 쏘아붙였다. 시계(市界) 밖의 저렴한 곳 정도면 (마지못해) 해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조치도 해줄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파렴치한의 본보기로 나를 지목하곤 익히 들어왔지만 실존하는지는 몰랐다는, 혐오의 표정을 시연했다. 쌍둥이를 품었다가 한 아이를 먼저 보낸 아내와, 남은 한 아이를 지켜보겠다며 두 손이 무릎에 닿을 때까지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는 것이 파렴치한의 모습이었던가. 


장문의 문자 전투가 시작됐다. 수인한도(환경권의 침해나 공해, 소음 따위가 발생하여 타인에게 생활의 방해와 해를 끼칠 때 피해의 정도가 서로 참을 수 있는 한도)와 재산권 추구라는 무기를 선보이기에 코로나-19와 생명권 추구로 맞섰다. 공사 중지 가처분에 30만 원으로 올라갔지만, 이미 전쟁이 시작된 터, 승강기 내 공사안내문 옆에 공사 반대 입장문을 붙였다. 경범죄 처벌법, 소음·진동관리법,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 방아쇠를 차례로 당겼다. 


월요일 출근이 어려울 것 같다는 의견을 회사 측에 전달했다. 공사 시작 즉시 가담한 자를 영상으로 채집하고, 112 신고 후 구청에 소음·진동 측정도 의뢰해야 했다. 사전 고지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아랫집 입구 쪽에 영상 촬영 등의 안내문도 붙이고, 관리사무소에도 입장문을 전달했다. 안내문 속 공사 책임자의 휴대전화 번호로 이 같은 내용을 작업자 모두에게 공유해달라는 문자도 보냈다. 


그러는 사이 공사 강행을 염려해 아내, 그리고 태아를 최초 제시했던 비즈니스호텔로 모셨다. 재택근무를 위한 모니터, 이틀간 숙식에 필요한 물품 등도 함께 옮겼다.


한 친구가 말했다. 

“완승! 상대방이 욕을 엄청 하면서도 결국 원하는 바를 들어준 거니 완승인 거야.”


계속되는 전투 끝에 출근일로 날짜가 넘어가기 직전, 상대방은 소음·진동이 심한 3일(호텔 3박 + Late check-out)에 한해 오전 오후 모두 최초 제시했던 비즈니스호텔로 피신처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뒤따라 은행 앱의 입금 알림도 도착했다.


알림은 비를 불러왔다. 미간이 집중돼있던 이틀이, 호텔 비용을 정확하게 얘기해달라며 아내에게 내뱉은 짜증이, 논리적 실수를 범해 자가당착에 빠지는 상대방의 모습을 즐기던 멍청함이, 찐득거리는 덥고 습한 날의 땀으로 느껴져 온 몸을 뒤덮었다.


씻어내고 싶었다. 승강기와 아랫집 입구에 부착한 무식함을 찢어야겠다고 아내에게 말한 뒤  빗길로 나섰다. 차량 안쪽에서는 피부 겉면만 뒤덮었던 찐득이가 점차 속에까지 침투했다. 빨간 불빛이 빗방울 사이로 명치 부근을 쑤시자 찐득이는 빛처럼 모여 명치 부근을 빼곡하게 메우다 빛과 함께 폭발했다.


두 손을 이마에 대고, 목을 최대한 집어넣고, 승강기와 아랫집으로 뛰어갔다. 아파트의 입구와 승강기의 CCTV의 시선이 명치 부근을 관통했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라도 채우고 싶어 과자를 입 안에 쑤셔 넣었다. 과자 봉지 속에서 연거푸 주먹이 나왔다. 갈피를 못 잡던 시선이 명치 부근에 머물렀다. 필요한 일이었다.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정당했다. 상대방의 뜻대로 대응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완승’했다. 그런데 위로받고 싶었다. 행여 부스러기라도 튀어나올까 침묵하다 좁은 틈을 뚫고 또 새어 나왔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어서”


무사(武士)에겐, 

날 선 칼과 튼튼한 방패와 함께 주술 또한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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