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펀치 Aug 19. 2017

깃털처럼 가볍고 인생만큼 무거운, 더 테이블

김종관 감독의 새 영화 [더 테이블]을 보고

자주 공부를 했었거나 누군가를 만났던 카페에 가면 그때의 공기 냄새, 특정인과 나눴던 대화의 조각 같은 것들이 떠오르곤 한다. 수없이 많은 주제들이 탁자 위로, 일회용 컵 위로 뭉게뭉게 솟아올랐다 흩어진다. 


어제 본 영화 얘기, 지난주에 한 소개팅 얘기, 간밤에 꿨던 꿈 이야기, 가족들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런 얘기들을 했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테이블 위에서 나는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쓴 책에 대한 레포트를 썼고, 세계 정치를 공부하기도 했다가 가끔은 고흐와 호퍼를 공부했다. 그러니까 자주 가던 카페 그 자리에는 나의 시간과 이야기, 나의 역사가 얹혀 있다. 

출처 다음 영화

김종관 감독의 새 영화, [더 테이블]에 등장하는 장소는 하나다. 어떤 카페의 테이블. 오전 11시부터 오후 9시까지 한 카페의 테이블 위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네 가지 에피소드로 다룬다. 주변에서 흔히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 하지만 막상 찾아보면 내 옆에는 없는 그런 '아는 사람 이야기'. 익숙하게 상상할 수 있는 그 패턴에 일상과 영화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시간이 공간이 되고 공간이 시간이 되는 곳,

서로가 서로에게 살던 시간을 선물하는 공간, 

한철 마음이 지나가는 곳.


출처 다음 영화

같은 장소, 단 몇 시간이지만 그 안에는 철없던 시기의 지난 연애가 있고, 뜨거웠던 하룻밤이 있으며,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던 10년의 시간과 딸과 함께한 먹먹한 시간이 조우한다. 가만히 앉아 있지만 우리는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다. 테이블 위에는 체코, 인도, 놀이동산 같았던 파리, 인도 카레, 파스타까지 놓인다. 수많은 공간과 시간, 커피와 이야기가 만나 맛있는 하나의 '시간 요리'가 된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시간과 만날 때, 우리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세계가 탄생하는 것을 목격한다. 평행을 달리던 시간과 공간이 섞여들며 생기는 부드러운 빅뱅. 그러므로 테이블은 마주 앉은 두 세계가 번져 빅뱅을 만들어내는 공간이며, 하나의 우주와 같다. 탄생, 성장, 사랑, 여행 그리고 죽음. 이 모든 것이 무릎 앞 테이블 위로 번진다. 어쩐지 카페라는 공간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출처 다음 영화

누군가 앉았던 자리, 누군가 사용했던 찻잔, 누군가 내다보았던 바로 그 창문. 그 시간과 기억 위로 나의 것을 얹으며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에게 번져가고 있는 것이다. 차가 우러나오듯, 폭발한 별이 새로운 빛을 만들어 내듯.


영화는 7일 동안 촬영했다고 한다. 하루와 일주일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촬영 시간이 길지 않았다고 하니 관객과의 거리가 가깝게 느껴진다. 김종관 감독은 홍상수 감독처럼 뻔한 상황과 뻔한 대화, 우리가 흔히 접하는 평범한 세상, 일상의 클리셰들을 잡아내 스크린 위로 끌어올린다. 

이 때 정유미 표정=내 표정(...) 출처 다음 영화

하지만 홍상수 감독의 작품보다 더 좋다고 느끼는 것은 그 아래 조금 더 부드러운 형태의 삶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 그 안에는 조금은 찌질하고 나쁘고 어긋나고 비틀거리는 내가 있지만 감독은 그 안에 녹아있는 인간의 외로움과 슬픔, 오롯이 혼자서 이고 나가야 하는 삶의 무게까지 고려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1시간 10분, 아이스커피 한 잔을 마신 듯 가볍고 유쾌하게 웃고 나오면서 좋아하는 시가 한 편 떠올랐다.

水墨 정원·9 - 번짐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덩케르크], 놀란이 그리는 전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