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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펀치 Jul 26. 2017

[덩케르크], 놀란이 그리는 전쟁

'우리'에 대한 이야기, 사실주의 전쟁 영화

놀란은 전쟁영화마저도 이렇게 만들 수 있구나 싶었다. 나는 그가 만들어 놓은 두 시간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죽음을 피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인간의 모습을 숨 죽이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폭격이 덮치고 사람들이 죽는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 살아남은 자들은 익숙한 죽음을 털고 일어나 다시 집으로 가는 줄을 선다. 황량한 바다. 죽음은 지뢰처럼 곳곳에 박혀있고 폭격은 이름을 가리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이 영화 속에는 이름이 없다. 그 어떤 이름도 이름으로 불리어질 수 없는 곳. 이름의 죽음을 애도하기엔 다들 이미 너무 많은 아픔을 겪었다.


살기 위해 기를 쓰고 숨어 들어간 곳이 나를 죽일 올가미가 된다. 적의 공격은 뒤통수를, 때론 옆통수를 친다. 마음을 놓는 순간 어김없이 배는 전복되고, '집으로 갈 수 있어' 희망을 갖는 순간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든다. 죽음이란 지뢰는 괴물이 되어 사람들을 덮치고 그 공포는 '우리'를 없앤다.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나의 가족들. 그들을 위해 다른 사람을 밟고서라도 돌아가야 한다. 집이 바로 저 앞에 보이는데.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영화 [덩케르크]에는 슈퍼 히어로가 그리는 익숙한 승리나 패배가 없다. 눈물로 외치는 전우애도 없다. 국가를 위해 죽겠노라는 거창한 구호나 과장된 외침은 살기 위한 발버둥 앞에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한 걸음 차이로 삶과 죽음이 바뀌는 그곳에는 흔히 전쟁영화들이 그려낸 '색깔'이 없다. 있는 것은 그저 무표정의 군인들, 무채색의 땅, 야속하게 파란 하늘, 그리고 도저히 집에 가도록 허락해주지 않는 바다뿐. 아무도 누군가의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는 공간, 알 필요도 없는 곳.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대사는 많지 않고 그래서 모든 말이 날카롭게 와 박힌다. "보인다고 해서 다 갈 수 있는 게 아니야" "생존은 불공평해" 불공평한 생존이 가장 날것 그대로 증명되는 해변에서의 일주일, 바다에서의 하루, 그리고 상공에서의 한 시간.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하지만 그런 무기력함으로 마음이 황량해질 때쯤, 우리는 사실에 기반한 희망을 본다. 구축함의 반의 반도 안 될 어선과 작은 배들을 몰고 온 누군가의 아버지들. 이름을 잊은 듯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군인들이 처음으로 환호했던 순간이었다.


폭격에 터지는 익숙한 죽음. 하지만 수없이 늘어선 같은 색의 철모 아래엔 정확히 같은 개수만큼의 삶과, 색깔과, 이름이 있다. 하나의 이름이라도 더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힘을 모으는 사람들. 그 간절함의 합은 구축함보다 힘이 셌다. '나'에 대한 것이 '우리'에 대한 것으로 바뀔 때 비로소 우리는 잃었던 이름을 되찾는다.


탈출에 성공한 직후 한 병사가 구출을 도왔던 소년에게 '우리가 부끄럽지 않으냐' 묻던 장면이 머리에 맴돈다. 그는 한 노인이 수고했다며 건넨 담요를 전해받고 '그 영감 내 얼굴도 쳐다보지 않았어'라며 자책한다. 사실 노인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기차를 타고 돌아오며 만난 수많은 환영 인파. 살아 돌아온 것, 그것이 승리라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이야기해주는 시민들. 그는 그제야 맥주병을 손에 들고 활짝 웃었다.


결국 사람을 살리는 것은 구축함도, 큰 승리도, 담요도 토스트도 아닌 바로 이런 공감과 연대라는 것. '나'의 일을 '우리'의 일처럼 기뻐하고 각각의 이름이 얼마나 큰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아는 것.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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