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신촌의 한 음반가게에 근무했을 때의 일이다. 앨범을 담는 투명 케이스를 정리하고, 카운터를 보고, 유플렉스 지하 화장실에서 걸레를 빨아다 먼지 덮인 CD를 하나하나 닦는 것이 나의 업무였다. 오전조 알바생이 아마 어디까지 닦았을 거라고 대리님이 일러주셨다. 매장이 넓어 전부 다 닦으려면 한 달도 넘게 걸릴 것 같았다. 그쯤 되면 처음 닦았던 선반의 먼지가 다시 쌓인다고 팀장님이 덧붙였다. 나는 곧 새로 생긴 명동점으로 파견(?)을 나가야 했기에 결국 신촌점 CD를 다 내 손으로 닦는 경험은 하지 못했다.
어느 날 머릿속 미국인의 이미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한 남자가 손님으로 왔다. 그는 가게 문을 들어오면서부터 살갑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한국말을 잘 못 해서.." 한 글자씩 또박또박 발음하려는 모습이 귀여웠다. 내게 영어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며칠 전 거금 들여 토익 점수를 따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취준생이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다행이라는 듯한 밝은 표정. 그리고 이어 무지막지한 속도의 영어가 쏟아졌다. 어눌한 한국말과 유창한 영어, 그 당연한 괴리에 순간 당황스러웠다.
중간중간 들리는 단어를 통해 질문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일렉트로닉 음반들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나는 해당 선반으로 그를 데려다주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남자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한국인 아티스트의 음반을 사고 싶다고 했다. 또 쏟아지는 영어. 대충 듣자니 자기가 사는 곳에서는 한국 앨범을 구하기가 어렵고 한국 음악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도 않아서 온 김에 사가고 싶다고 했다. 여행을 다닐 때마다 그 도시에서 이렇게 음반을 사곤 한다고 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일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매장 어느 곳에 어떤 앨범이 있는지 제대로 익히지 못했을 때였다. 해외 음반은 장르별로 나눠져 있는데 반해 국내 음반들은 K-POP 딱지 아래 가나다 순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간절히 바라보는 손님을 실망시킬 수 없어 팀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아, 우리 매장에 이디오테잎 앨범 2장 정도 있을 텐데?" 팀장님이 말씀한 곳을 살폈다. 전형적인 한국 발라더 이모 씨 앨범 뒤에 정말로 이디오테잎 앨범 2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디오테잎은 그때 기준으로 1년 전쯤 유희열의 스케치북 일렉트로닉 밴드 특집에서 처음 봤다. 총 세 팀이 나왔었던 것 같은데, 그중 가장 내 흥미를 끌었다. 멀끔한 미국인은 "와우+그레이트+땡큐"를 외쳐가며 CD를 받아 들었고 정규 1집 <11111101>을 사서 떠났다.(아마도?) 낯선 도시에서 구한 낯선 아티스트의 앨범을 미국 집에서 듣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가려다 중간에 뒤돌아 신나는 얼굴로 “땡큐 어게인!”을 외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웃으며 인사를 하다가 문득 저 사람은 어디서 뭘 하는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미국으로 곧 돌아간다 했으니 한국에 거주하는 사람은 아닐 테고, 평일 오후 캐주얼한 옷차림을 보아하니 출장 온 비즈니스맨은 아닌 듯했다. 굳이 일렉트로닉 음반을 집어 추천해달라고 한 걸 보면 일단 장르를 좋아하는 건 분명한데.
프로 뮤지션일 수도 있고,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데 현실은 따라주지 않아 친구들과 밴드를 꾸려 연습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각국을 돌아다니며 기념품처럼 음악을 수집하는 여행광일지도 모른다. 블로그나 웹페이지에 '서울 여행 후기'를 올리며 일종의 전리품 같은 느낌으로 앨범의 후기를 써 올렸을지도. 아니면 내 예상과는 반대로 멀끔한 회사원일 수도 있다. 낮에는 상사들 앞에서 신제품과 관련된 발표를 하고 밤이 되면 친구들과 모여 클럽으로 향하는.
CD가 틀어질 장소에 대해서도 상상했다. 영화에서 본 대로 작은 마당이 딸린 집 안, 복도 끝 작고 어질러진 방, 구석에 놓인 베이스, 엉망으로 놓여있는 CD들. 그 사이로 이디오테잎의 곡이 흘러나올 수도 있겠다. 아니면 차 안 일까? 창문을 열고 달리던 도중, 심심한 남자는 '아 그때 한국에서 사 온 CD가 있었지' 하고 문득 생각한다. 한 손은 운전대에 둔 채 다른 손으로 조수석 앞 서랍을 뒤져 이 앨범을 찾아낸다. 그리고 곧 창문 밖으로 흘러나오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무심한 일상이 빚어낼 다른 사람의 일상이. 내 손으로 무심하게 케이스를 벗기고, 바코드를 찍고, 웃으며 건넨 CD 한 장이 비행기를 타고 내가 밟아보지 못한 낯선 대륙에 가 어느 낯선 이의 삶 일부분이 되다니. 그날은 다른 날보다 힘들었는데도 그 상상만으로 한참을 신났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분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내가 판 그 CD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