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이화교지에 썼던 글
이번 여름, 또 하나의 시험에서 떨어졌다.
발표가 예정된 날 오전 10시. 불편한 마음에 아침부터 깨어 괜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데 함께 시험을 본 사람에게 문자가 왔다. 그는 합격소식을 전하며 환히 웃었다. 글자 하나하나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에게서 꿈내음이 났다. 벚꽃같이 화사하고 복숭아처럼 향긋한 그런 냄새였다. 나는 축하한다며 웃었다. 핸드폰 위에 새겨진 내 글자들은 죽 늘어놓은 개미들의 사체더미처럼 보였다. 나는 합격 연락을 받지 못했다.
여름은 푸른 계절이라는데 나는 낙엽처럼 지고 있다. 그렇담 언젠가 피어본 적은 있었는가? 그것도 모르겠다. 피지도 못하고 지는 낙엽처럼 나는 그저 그렇게 떨어진다. 그래도 낙엽은 떨어지는 자태가 아름답기라도 하지, 나는 뭐 낡은 추리닝이나 입고 앉아 다리를 긁적이며 내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이번엔 그나마 내가 세상에 태어나 잘 할 수 있는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내 글로, 10분 전 가장 처참한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어떤 시험에서 떨어진 불합격자의 글인 것이다. 그러니 ‘재수가 없으려니까-’하고 주홍글씨가 아로새겨진 이 페이지가 읽히지 않고 넘겨져도 나는 할 말이 없다.
가끔, 아니 사실은 자주 불합격 통지를 받는다. 그곳이 누구나 속하길 원하는 큰 곳이든, 적은 회원 수의 클럽이든 마찬가지다. 심지어 간혹 불합격자에게는 통지조차 오지 않는다. 합격자들의 기분 좋은 외침을 듣고서야, “아, 나는 역시 아니었구나” 할 따름이다. 편리하게도 늘 똑같은 패턴이지만 나는 멍청하게도 마지막까지 ‘혹시나 실수로 내가 누락된 것이 아닌가’ 하는 한낱 희망을 놓지 못한다. 나를 되짚어보며 ‘대체 왜?’라는 헛된 질문을 계속하며 끝없는 정신적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래서야 만년 불합격 인생만을 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나의 아름다운 청춘이 진다. 푸르디푸르던 스무 살, 1학년 때 패기 넘치게 가졌던 열정과 꿈은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며 거절의 벽에 부딪혀 사라져간다. ‘그깟 작은 체계에서 튕겨져 나왔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지는 것이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직 젊다. 모든 것을 훅훅 털어버리고 일어서기에 아직 나는 긁히지 않은 마음이 너무나 넓다. 나름대로의 의미 있는 삶들과 생각들이 왜 권력을 지닌 어떤 자들의 틀에 의해 거절당해야 하나? 주저앉은 물음에는 끝이 없다. 별 것 아니라고 할지라도, 마음에 지는 상처는 크다. 상처를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것은, 늘 말만 그렇게 쉽다.
꿈도, 열정도 모두 사그라진다. 나에게 남은 것은 붉은색 ‘불합격’ 통지와 거절에 익숙해가는 마음의 긁힘 뿐이다. 차곡차곡 현실에 인정받을 무엇인가를 쌓아 앞으로 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그저 주저앉을 뿐이다. 누군가는 불합격으로 인해 앞으로 나아갈 더 큰 동기를 얻을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가끔은 다그치기도 한다. 너는 왜 더 도전하지 않느냐고, 왜 더 치열하지 않느냐고. 도전하고, 더 치열하게 살면 언젠간 내 진정이 통할 거라는 거다. 그 때마다 “그 도전과 진정이란 게 무엇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물음을 입 밖으로 내던지고 싶은 것을 꾹 참는다.
내 진정과 내 도전은 틀린 것인가? 나는 끝없이 나를 평가받기 위해 어딘가로 밀어 넣고, 그 체제는 버티고 서있는 나를 꾸역꾸역 도로 밀어낸다. 나는 통과 도장을 기다리는 통조림처럼 컨베이어벨트 위에 선다. 물론 나는 도장을 가진 자들로부터 선택되지 않는다. 광택이 부족했던 것인지 내용물이 잘못됐던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나의 색깔이 잘못됐던 것인지 도무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이럴 때마다 자괴감에 휩싸인다. 나는 나를,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삶이 완벽하지는 않다만 틀린 곳 또한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회는 누구나에게 열려있는데도 해내지 못한 것은 나의 탓이다. 나는 나의 식대로 의미 있게 살아왔지만 어느 곳에서는(혹은 모든 곳에서) 그게 의미 있지 않은 탓이다. 긍정과 낙관이 가득 찬 세계에서 내가 설 자리를 열심히 뒤져보지만 부족한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열정이 사라진다. 꿈도 사라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그런 봉황 같은 것이 실제로 존재하기나 할까’하는 걱정이 치고 올라온다. ‘이렇게 부족할 바에야 미리 틀에 맞춰 좀 살 걸‘이라며 탄식을 내뱉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내가 학년에 비해 너무 한가롭게 살든, 생각이 없든, 철이 없든, 적어도 틀에 맞춰 살고 싶지가 않다. 그러니까 나는 망했다. 망할 것이다. 지금 시험에 떨어졌다고 우울해서 그러는 거 맞다. 거절당한 억울함에 이렇게 긴 글을 마치 일기장처럼 이용하고 있는 것도 맞다. 배터리가 방전되는 마냥, 지금 나의 자신감은 바닥을 치고 열정의 끈은 종료되기 일보직전이라며 깜빡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관적인 글이 마지막을 맺을 수 있는 이유는 적어도 아직은, 끝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것이, 적어도 가만히 멈춰 있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떨어짐도 움직임이다. 남들은 올라가며 움직이고 있지만 나는 떨어지며 움직이고 있다. 그것만큼은 같다. 어쨌든 이번 떨어짐도 이 글 하나 정도는 만들어내지 않았나. 내가 그래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부딪혀 거절당한 곳보다는 아직 거절당할 곳이 더 많기 때문이다. 내 유리심장이 부서지는 순간은 앞으로도 많이 있겠지만, 그 순간에도 나를 믿어주고 지탱해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방전된 모든 것은 항상 새롭게 충전될 가능성이 있다. 정현종 시인도 그의 시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에서 말하지 않았나. 떨어지는 모든 것은 항상 튀어오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더 세게, 더 아래로 내려간 만큼, (적어도 언젠가는) 더 크게 높이 치솟을 것이라 믿는다. 떨어지기는 해도 쓰러지지는 않는 사람이 될 것이다. 뜬금없지만, 그런 의미에서 내일 모레 락페나 가서 충전이나 좀 하고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