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랜드> 스포일러 없는 리뷰
이 영화의 주인공은 승무원 정인(배수지)이다. 멀지 않은 미래. 끔찍한 사고가 있기 전까지 정인은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다. 사랑하던 남자친구 태주(박보검)가 사고가 일어난다. 뜨겁게 사랑했던 두 사람. 혼자가 됐다는 외로움에 정인은 '원더랜드' 서비스를 알아본다. 원더랜드 서비스는 간단하다. 일종의 멀티버스에 사랑하는 사람을 구현시켜 그 인물과의 영상통화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서비스를 관리하는 사람은 (정유미)와 (최우식)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고고학자 바이리(탕웨이)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딸을 잃은 바이리. 바이리는 딸이 살아있다는 일념 하에 원더랜드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간절한 그리움에 있는 사람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볼 수 있는 건 질문이다. 어떤 질문? 이 영화가 나누는 세 가지 챕터에 따라 각기 다르다. 첫 번째 질문은 정인과 태주의 서사에서 읽을 수 있다. 기본적인 설정. 정인과 태주는 서로 알콩달콩 예쁜 연애 중이었다. 하지만 사고가 나 태주가 식물인간이 된다. 정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원더랜드를 통해 가짜 태주를 만든다. 이 말은 곧 ‘사랑하는 사람을 같은 존재로 대체하겠다’라는 말처럼 들린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히네’ 같은 노래가사 같은 사랑이 아니다. 그 사람의 빈자리를 그 사람으로 메울 수 있을까?라는 사랑의 난제에 도전한 것이다. 이 <원더랜드>는 전적으로 영화 같은 정인의 사랑에 대해 질문한다. 글쓴이 생각엔 이 질문 던지기가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 같다. 왜? 이 질문이 정인의 입장에서 딜레마가 되는 데 있어 SF적 상상력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진짜/가짜 태주 사이의 갈등은 (보통의 sf가 다루는) 철학적인 문제임과 동시에 ‘뭐가 진짜 사랑이야?’라는 로맨스적인 요소가 된다. 이것은 영화가 갖고 있는 윤리적인 문제가 로맨스, SF장르 모두를 꿰뚫는 좋은 수가 됐다. 인간을 복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와 사랑을 같은 사랑으로 대체할 수 있는가?를 동시에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 덕에 <원더랜드>는 이 장르를 고른 당위성을 어느 정도는 챙겼다.
두 번째 질문. 이 원더랜드를 운영하는 해리와 현수의 서사로 읽을 수 있는 질문이다. 이 두 인물은 이 영화에서 돋보여야만 하는 캐릭터다. 왜? 이 두 사람의 속성 때문에. 이 인물들을 거칠게 말하면 '복제인간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이 설정은 해리와 현수가 영화 안의 인물들의 위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설정이다. 실제로 영화 안에서 원더랜드 안의 사람들이 말썽을 일으키면 두 캐릭터가 해결책을 고심하는 장면이 있고, 이 부분은 두 사람의 서사에서 중요한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이 두 사람의 이런 행보가 윤리적으로 옳은가?라고 질문한다. 또 인간이 인간에게 개입할 수 있는 선이 실재하는가?라고도 묻는다고 볼 수 있다. 이 질문을 구현하는 것이 할머니와 손자에 관한 이야기다. 이 두 사람이 연애하는 것을 그릴 수도 있고 원더랜드를 운영하는 애로사항에 대해서도 다룰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굳이 이 사건을 골랐다. 할머니와 손자 간의 사건에 개입하는지를 고민하는 모습을 중요하게 보여준다. 이 고민은 영화 안에서 강조되다 해리와 현수가 후반부에 고른 선택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데,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인간의 내면에 도전하는 난제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장르를 잘 골랐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세 번째 질문. 바이리의 서사에서 읽을 수 있는 질문은 '이렇게 만들어진 인공지능을 정말 사람이라고 인식해도 될까?'에 대한 부분이다. 바이리는 죽은 사람이다. 해리와 현수가 프로그래밍을 통해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가상세계를 뒤흔드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 뒤흔든다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영화가 정말 중요하게 밑줄 그은 부분은 딸 바이지아의 리액션이다. 바이리만 일방적으로 뒤흔들지 않는다. 바이지아도 이 행보에 호응하는 형식으로 플롯이 짜여 있다. 두 사람이 선을 직접 넘어드려고 노력한다는 것. 이 의미는 영화가 이 선에 대해 응시하고 싶었다는 의미기도 하다. 더 나아가 바이리와 함께 등장하는 성준(공유)의 캐릭터는 이 선 그 자체를 암시하는 인물이다. 후반부에 이 인물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이 인물의 동선으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가로지르며 이야기를 연결하고 있다. 이 SF의 장르적인 특성을 살린 선택은 두 번째 질문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가족드라마적 특성과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바이리라는 인물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SF적 상상력으로 구현하면서, 장르가 가진 윤리적인 부분도 건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축을 이루고 있는 세 이야기 전부 뒷심을 보여주지 못한다. 첫째. 태주와 정인의 로맨스와 관련된 부분에는 각본 상 결함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우선 태주가 오랜 시간 동안 식물인간이었다고 하는 건 충분히 납득할만한 설정이다. 하지만 이 설정에 지나치게 기대 영화의 무리수로 돌아오는 장면이 몇 있다. 가령 영화 안에서 정말 태주의 행동인지 아닌지 관객에게 묻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태주라는 인물의 추후 행보가 가능한가?라는 점에서도 의문이고 이게 두 사람의 사랑과 뭔 관련이 있는가?라는 점에서도 단점으로 돌아온다. 정인의 내면 역시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줌과 동시에 더 나아지는 것을 애초에 포기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인물의 방향성을 초반부터 딱 정해놓고 외부가 끼치는 영향을 전부 차단했기 때문에, 정인이는 옛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인물인 것처럼 묘사된다. 두 사람의 로맨스가 여운을 만들며 사랑영화가 가진 힘을 보여줘야 하는데 '쟤 왜 저래'만 남는 것이다. 로맨스와 SF의 공존에 대해서만 연구하고 정작 자세한 부분을 채우지 못한 패착이 느껴졌다.
둘째. 바이리와 현수/해리의 서사에 관한 부분이다. 두 서사는 결합하지 못하고 서로 붕 떴다. 이 부분은 다양한 예를 들어 쓸 수 있겠지만 글쓴이는 바이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 시놉시스에도 언급됐듯이 바이리는 복제인간이다. 실제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캐릭터가 실제 인간과 차이점을 더 부각하는 연출이 이 영화의 핵심과도 이어진다는 의미다. 왜? 실존이라는 조건이 아니더라도 가족의 유대감을 ai가 구현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토의를 자유롭게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가 굉장히 적극적으로 '이 캐릭터는 인간과 다를 바 없어요'라고 강조하고 있는 듯했다. 이건 두 사람 현수/해리에게 몰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왜? 이 연출은 영화가 가진 모순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AI로 만든 세상이라고 공언했는데 이 인물이 이렇게 행동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프로그래머가 만든 프로그램을 통제하지 못하는 게 현실성이 있을까? 글쓴이가 이런 의문이 든 이유는 감독이 '바이리의 서사를 중요하게 생각해서'라고 생각한다. 그 무엇보다 바이리의 숭고한 무언가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선택이 오히려 현수와 해리의 개성을 납작하게 만드는 악수처럼 느껴졌다. 프로그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윗문단의 연장선상에서 성준, 해리, 현수의 캐릭터 세팅은 끝마무리가 이상하다는 점에서 과연 기획의도를 잘 살렸을까? 의문이 들게 만든다. 우선 해리와 현수는 사이좋은 선후배 관계다. 영화 안에서 뭐 이렇다 할 그게 없다. 큰 문제는 '이렇다 할 그게 없다'는 점에서 온다. 이 둘은 가족이 원더랜드와 관련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실제로 분량도 크다. 하지만 이 사건은 나열에서 그치고 플롯의 선후관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후반까지 가면 이 무의미한 설정들이 더 크게 다가오는데, 영화 안에서 의미를 보여주지 못하고 캐릭터를 기능적으로 남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 <원더랜드>는 그걸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상한 대사를 넣기도 했다. '우리 잠깐만 사귈래요'같은 대사가 있었는데 이 문장이 이후에 두 사람 간의 관계에 유효타를 끼치지도 못했으며 현수와 해리 사이의 로맨스의 ㄹ자도 없었다는 것이 부실한 서사를 더 돋보이게 만드는 악수였다.
글쓴이가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단점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성준 서사다. 이 영화에서 성준이가 왜 필요했을까? 글쓴이는 단지 바이리의 존재를 부각하기 위해서 단지 바이리의 존재만을 부각하기 위한 것 말고는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왜? 성준이 바이리에게 그 어떤 존재도 되지 못한다. 대신 다른 주인공과의 공통점은 있는데, 이 공통점도 이야기에서 핵심을 드러낸다거나 하는 설정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인물이 겉돈다. <가족의 탄생>에선 1인 2역으로 구현하던 캐릭터의 생동감이 본작 <원더랜드>에선 죽은 것이다.
이야기에서 몰입감을 잡지 못하다 보니 CG의 상태에 대해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사실 극후반부 전까지는 시각화를 따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이 영화는 윤리적인 문제를 장르적인 특성과 결합시켜서 관객에게 던지는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해 비판하고 싶다면 작품이 던지는 화두에 대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라고 맞는 게 적절하다고 볼 수 있지 않겠어? 영화가 그 부분은 나름대로 제 구실을 하고 있으니 최무성 배우의 캐릭터가 속해있는 세계가 풍기는 이질감이나 가짜 태주가 있는 우주의 어색함을 일일이 따지지 않는다면 보는데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 시각화의 퀄리티가 영화의 엔딩에게 칼끝을 겨누고 있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글쓴이가 이 영화의 엔딩을 보고 든 생각. <가족의 탄생>과 지나치게 대비된다는 점이다. <가족의 탄생>의 엔딩을 생각해 본다. 그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가족의 탄생>이 그린 가족 구성원과 유사하게 닮아있다. 그리고 엔딩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그 영화의 플롯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탐탁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정을 주고받는 가족의 속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 <원더랜드>는 뭘 추구했을까? SF와 가족드라마의 접합을 시도했다. 어떻게? <가족의 탄생>을 어설프게 따라 했다. 핵심은 '어설프게'라는 점이다. 이야기의 구조를 엔딩에서 집약시킨 것도 아니고, 어설픈 VFX로 시각적인 설득력을 보여준 것도 아니며 가족영화로서의 감동도 잡지 못했다. 그렇다고 엔딩에서의 사건이 치밀한 핍진성을 통해 구현된 것인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1차원적으로 보면 그 사건 자체는 합리적이지만 인물의 내면을 촘촘하게 묘사하지는 못했다는 점과 성준의 동선이 꼬인다는 점에서 마무리를 잘 짓지 못했다. 반대로 바이리가 그 장면에서 특정 사건이 벌어졌다고 해서 영화가 핍진성이 무너진다는 보장이 있을까? 글쓴이는 아닌 것 같다. 영화 전체적인 아이디어 '결핍을 SF적 상상력으로 채운다'라는 것을 해치지도 않는 것 같다. 어차피 이 '원더랜드' 서비스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어떤 것도 건드리지 못한 채 진부한 방식으로 마무리짓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부분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시각화하는 방식은 극의 몰입을 깬다. 전반부야 그럴 수 있다지만 후반부에서는 확실하게 힘을 줬어야 하는 것 아닐까? 기억에 남는 건 바이리 역의 탕웨이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다.
어떤 관점에선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스크린에서 오랜만에 보는 박보검 배우의 해사함이나 이제 베테랑이 된 배수지 배우의 경험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관람에는 무리가 없다. 하지만 이 김태용이라는 이름이 한국영화에 <만추>와 <가족의 탄생>이라는 선물을 두고 갔던 것 치고는 너무나도 부실한 결과물이다. 솔직히 감독 이름 가리고 냈으면 누군가의 입봉작일 거라고 생각할 것 같기도 한 것이 이 <원더랜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