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 아래에서

by 뚱띵

장례식장은 누구나 낯설다. 초행길이라 물어물어 간 지인의 장례식장에는 입구부터 두리번거리는 조문객과 낯선 지인을 맞는 무거운 표정의 상주가 보인다. 아직 보낼 준비가 안된 이들이 자아내는 이 익숙지 않은 분위기가 고인을 잃은 슬픔을 고조시킨다. 나는 조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잊지 못할 어린 시절의 장례식장을 떠올려본다.

내 기억 속 장례식장에는 철없고 가여운 한 소녀가 있었다. 초저녁을 조금 넘겼을까? 막걸리를 마시면서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두런두런 나지막하게 들렸다. 우리 집 강아지 복실이마저도 조용했던 보름이 다가오는 달이 훤한 1987년 7월의 어느 저녁이다. 마당 곳곳에 설치된 노란 백열등 불빛만이 군데군데 앉은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나는 어두워진 안방 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설움인지 원망인지 슬픔인지를 꿀꺽꿀꺽 삼키며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한참 뒤 다리가 저려올 때쯤, 술기운 탓인지 밖에서 조문객의 대화소리가 커지면서 시끄러워졌다. 이내 나는 '제발 조용히 혼자 있고 싶다'는 짜증 섞인 마음이 들었지만, 그저 이렇게 있는 게 아빠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라고 여기면서, 꾸역꾸역 울먹임을 삼키다가 그렁그렁 맺힌 눈물만 뚝뚝 흘리며 앉아있었다. "그래, 현영아, 니는 더 많이 울어야 한다. 아빠가 제일 이뻐했다 아이가 " 하시는 고모부 말씀이 들린다.

연둣빛 고운 병풍 뒤엔 아빠가 누워계셨다. 그 귀여워했던 장녀가 이렇게 앞에 앉아 있는데도, 한마디 말씀도 없으셨다. 그저 3.8선마냥 떡하니 병풍하나 세워두고, 삐진 사람처럼, 잠시 숨은 사람처럼, 그렇게... 그렇게.... 또 그렇게 계셨다. 토라지셨다면 다정하게 불러볼 텐데, 숨어 계셨다면 살며시 다가가 '찾았다'하며 깜짝 놀라게 할 텐데,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숨 죽인 채 함께 할 뿐이었다.

아빠의 병환은 나의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였다.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은 지 며칠 뒤, 병원에 계셨던 아빠가 수염 덥수룩한 얼굴로 들것에 실려오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엄마의 극진한 간호로 다행히 빨리 회복하셔서 중학교 1학년때는 하굣길 학교 정문 앞에 웃는 얼굴로 마중나오시기도 했던 다정한 분이셨다. 그러던 분이 몇 년 뒤 또다시 쓰러지셔서 그 길로 회복하지 못하고 그렇게 떠나버리신 것이다. 그리하여 철없는 딸에게 '아버지'라고 불릴 시간도 주지 않고 영원한 '아빠'가 되었다.

시간은 어느덧 깊은 밤을 향해가고 있었다. 상주들은 슬퍼만 할 수 없다. 늦게까지 찾아와 슬픔을 함께하는 조문객도 맞이해야 하고, 그들의 식사도 챙겨야 한다. 물론 상주들도 돌아가며 끼니를 때워야 한다. 슬픈데, 슬퍼만 하기도 억울한데, 자꾸만 먹으란다. 지금 못 먹으면 나중에도 기운 달려 더 못 먹게 된다면서 말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딨어?' 하면서도 더 이상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러나 울다 지쳐 멍하니 있다 보니, 어느새 잡힌 손목은 차려진 밥상앞으로 이끌렸다.

나를 챙겨주는 주윗분들이 고마울 일이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나는 세상이 바뀌었다'고 보여 적응 안 되는 새 세상의 외지인처럼, 부랑자처럼 원인 모를 심통만 부렸다. 그 세계의 모두와도 다 싸울 태세이고, 제발 좀 나와 싸워줬으면 하는 간절한 심정도 있었다. 시쳇말로 '장렬히 전사'하고 싶었다. 원 없이 싸우다가 끝내고 싶었다. 최소한 내가 이기지 못할 것을 알기에 ‘이건 아니잖아요!’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네?’라고 외치며 포효하고 울부짖기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18세 소녀의 외침은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고, 홀로 남게 되었다. 변해버린 이 세상의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튿날, 장지를 향한 상주와 조문객들의 곡소리가 미웠다. '아이고'로 모든 감정을 퉁치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눈 마주치고, 자연스럽게 얘기 나눴던 사람을 무심히도 매장을 해야하는 그들만의 풍습이라는 절차가 너무나 미웠다.

아빠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많이 놀라시진 않으셨을지, 혹시나 무섭지는 않으셨을지, 오히려 덤덤하게 견딜만하셨을지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짐작해 보았다.

그렇게 아빠를 홀로 남겨두고 내려온 그날은, 새파란 하늘엔 해도 잘만 떠 있고, 바람과 구름은 또 어찌나 잔잔하던지... 그리고 저 멀리 산 밑으로 보이는 바다는 어찌 그리 빛나던지... 이 아무렇지 않음에 배신감이 들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그 여고생은 ‘하늘의 뜻을 안다’하는 지천명(知天命)을 넘겼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 사람은 어찌하여 태어나서 살다가 그렇게들 죽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슬픔은 남아있는 사람만 가졌을지 떠난 사람도 같이 슬퍼하시는지도 모르겠다. 또 이 모든 슬픔들 뒤엔 어떤 과정이 기다리는 건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하던데, 나는 정말 잘 살고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들면서 가끔씩 밀려드는 허망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돌이켜보면 "아빠가 계시니까 지금의 우리가 있는거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엄마의 말씀처럼, 비록 8여 년을 병상에 누워만 계셨던 아버지셨지만, 한여름 아름드리 느티나무같이 그 귀한 자리를 지키고 계셨기에 어머니와 우리 자매들이 정서적 결핍 없이 지낼 수 있었고, 큰 의지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결국 그토록 힘든 세월을 지켰던 원천은 느티나무 아래 그늘에서 옹기종기 모였던 가족 간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가슴 먹먹하게 느낀다.

이렇게 오늘처럼 조문을 다녀온 날이면 내 기억 속 장례식장 어느 모퉁이를 서성이던 그 소녀를 포근히 안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