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퇴사 후, 여름 생활 보고서

백수라고 한가한 건 아니다.

by 떫은감

2024년 8월의 기록.


평일의 햇살

7월 부로 퇴사했다. 퇴직금 체불 때문에 끝은 안 좋았지만, 5년 간의 직장인 생활을 청산하고 잠정적 자유인이 된 기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달달허다 달달해. 백수의 삶은 이리도 달달한 것이었구나. 신이 있다면 거 듣고 계실지요. 잠깐 내 인생 가동 중단하고 평일의 햇살을 맘껏 즐기라는 거죠. 네, 그렇게 해볼게요.


새벽 요가

새벽 6시 요가도 끊었다. 남들 한창 자고 있을 시간, 최소한의 짐을 꾸려 집을 나선다. 그 새벽에도 여름의 덥고 찌는 날씨는 어디 안 간다. 송골송골 이마와 인중에 맺힌 땀을 한바탕 닦고 나면 어느새 요가 센터에 도착한다. 그때부턴 그저 강사의 리드에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아, 나 숨을 쉬는구나. 내뱉는구나. 내가 여기에 있구나. 살아있음을 마주하는 찰나다. 귀갓길엔 역시 커피 한잔이 좋다. 이 많은 걸 해도 이른 아침이라니 참 귀한 시간이다. 백수의 하루를 아주 충실히 시작한 나 역시 귀해진 느낌이 들었다.


라섹 수술

요즘처럼 시간 여유가 많을 때가 또 올까 싶어 부지런히 라섹 수술을 받았다. 오메 수술이 벌써 끝났단다. 라섹 수술 아프다고 하는 사람들 엄살이 심한가 보다. 라며 웃음이 났다. 고통은커녕 평생을 안경과 렌즈 없이 살아온 사람인 것처럼 그토록 자연스럽고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웬걸. 집에 도착하자마자 은근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얼마 안 가 고통의 주기는 더욱 짧아졌다. 그렇게 난, 전자레인지에 작게 보이는 LED 시계 불빛에도 눈물과 콧물을 사정없이 쏟아내는 예민한 원시 인간이 되었다. 손가락 몇 번 터치에 배달 음식을 시키는 세상인데 시린 눈에선 미친 듯이 눈물이 차올라 결국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3n년간 내 눈은 기본 장착템처럼 당연한 줄 알았다. 눈이 성치 않아 입에 풀칠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설움에 다시 어두운 이불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늦은 퇴사 짐 정리

사정상 퇴사 이후 회사에 짐을 정리하러 갔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 반가우면서도 근심 가득히 그늘진 얼굴이 안쓰러웠다. 크게 다를 것 없는 나 역시 안쓰럽게 느껴졌다. 누구도 이 허무한 결말을 맞이하고 싶진 않았을 테니까. 한때는 너무 미웠고, 한때는 또 고마웠던 사람들이다. 하나같이 낭떠러지에 내몰린 우리였지만 그래도 살아가야지. 언젠가 지긋지긋한 회사 일상으로 돌아가 '그때 정말 힘들었다고, 다들 자리 잡아서 너무 다행이라고, 아으 내일 출근하기 싫네요' 라며 술 한잔 기울일 날이 올 것이다. 같은 열차를 탄 팀장님과 마지막 악수를 하고, 쏟아져내릴 것만 같은 마음을 울컥 삼키며 열차에서 내렸다.

모기장 안에서만 생활하는 라섹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