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상한 하루

사건 중독자의 디톡스 데이

by 수다쟁이

오늘 나는 아무 일이 없었다.


어제 맛있게 커피 한잔을 마셨던 탓일까?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느지막하게 눈을 떴다.

채 물 한잔도 먹지 못했을 시간에 결정사 직원에게 전화가 왔다. 너무 고민하지 말라면서 다시 한번 내 외로움을 자극하는 감성 마케팅을 시도하였다. 말씀하시는 바 충분히 인지했고 고민하겠다는 시간까지는 나를 좀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으니 매일 전화 주시지 않아도 된다는 답변으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자길 믿고 등록해 보라는 매니저의 말에 조금 인상이 찌푸려졌다. 자영업을 하다 보니 마케팅해 주겠다는 광고 전화를 자주 받는데 그들은 얼굴 한번 못 본 나에게 돈 몇 백씩을 '투자'하라면서 자기를 믿고 맡기라는 말을 굉장히 쉽게 한다. 그래서 나는 낯선 사람이 본인을 믿어달라고 하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믿음직스러우면 서비스 먼저 하고 후불로 받던가. 본인이야 말로 날 믿어보지 왜 내 피 같은 돈을 맡겨둔 것처럼 달랐는지 모르겠다.


시간적 여유도 있고 부족한 수면을 채우기 위해 다시 한번 잠을 청하고 싶었는데 아침부터 울려대는 각종 알람 소리에 몸도 정신도 깬 것도 잠들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조금 괴로웠다. 핸드폰에 충전기가 멀쩡히 연결되어 있는데도 배터리가 충전되어 있지 않았다. USB 전원 쪽이 꺼져있었다.


오후 2시 치과 예약을 해두었다. 일 년에 한 번 스케일링 국가 지원을 잊지 않고 챙기기 위함이었다. 침대 위에서 치과까지의 시간이 묘하게 떠서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무언갈 하기도 싫었다. 소파 위에 늘어진 옷가지들을 보며 빨래도 개기가 싫어 그냥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출근 후 저녁으로 먹을 도시락을 쌌다. 좀 더 정성이 들어가면 냉동해 둔 빵을 프라이팬에 구워 바싹한 샌드위치를 만들었겠지만 그것마저 귀찮아서 그냥 얼어있는 빵을 그대로 반찬통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치즈와 녹인 햄 100g 그리고 다시 한번 치즈를 덮었다. 내가 좋아하는 메뉴다. 아침에 먹어도 저녁에 먹어도 맛있고 치즈가 들어가서 다이어트식이 아닌 거 같은(실제로 아닐지도 모른다) 기분이 들어서 즐겁다.


동시에 점심도 조리를 했는데, 카레를 먹고 싶은데 내가 요리한 카레는 냉동실에서 꽝꽝 얼어있는 덕에 예전에 사두고 잊어버리고 있던 레토르트 카레를 뜯었다. 전지현이 광고하는 인도카레인데 유년시절부터 먹은 오뚜기보다 조금 더 이국적인 맛이 난다. 오늘같이 귀찮은 날일수록 밥은 예쁘게 먹어줘야 좀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릴 수가 있다. 어차피 냉동해 둔 밥을 돌려서 카레를 끼얹어 먹을 것이지만 냉동 새우도 냉동 야채도 꺼내서 알록달록 그릇을 꾸며 보았다.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 꽤나 기분이 좋았다. 카레와 함께 닭가슴살도 한팩 돌려 먹었더니 마치 건강과 심미를 둘 다 추구하는 인플루언서가 된 거 같다.


조금 일찍 가면 일찍 해주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예약시간보다 30분 일찍 치과에 도착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2시까지 이길래 괜히 빨리 왔다고 후회하며 대기실에서 앉아있었다. 원래는 보고 있던 만화라도 이어서 시청할까 했지만 아무도 없는 적막감이 나쁘지 않아서 원장님의 이력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저분이 공부할 때 나는 무엇을 했는지 스스로를 좀 초라하게 느끼게 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친절하더라. 똑똑한데 친절하기까지 한 것은 반칙이다.


작년 스케일링 이후 거진 일 년 만에 찾은 치과였지만 다행히 충치는 없었다. 곧 간호사가 스케일링을 시작하였다. 매일 치실도 치간칫솔도 하기 때문에 조금 자신 있었는데 아랫니 뒤쪽 오른쪽 어금니 뒤쪽을 좀 더 신경 써서 닦으라는 조언이 돌아왔다.


스케일링 때문에 평소보다 늦은 출발로 학생을 기다리게 할까 봐 엄청 집중해서 운전을 했다. 1시간 거리를 출퇴근하는데 평소보다 10분은 빨리 도착한 것 같다. 중간에 신호 단속이 살짝 애매한 게 있었는데 분명 노란불일 때 건넜으니 괜찮을 것이다 라면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출근과 업무.

"넌 왜 그렇게 사건 사고가 많아?"라는 말을 들을 만큼 같은 기간 동안 남들보다 많이 움직이고 사람도 많이 만나는 사람답게 여러 사건이나 이벤트에 휩쓸리는 경우가 있는 사람이 나다. 한 때는 그런 스스로에게 지쳐서 팔자려니 하고 받아들인 적도 있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 재미있는 일 없어요?"라는 학생의 말에 멍하니 하루를 돌이켜 보니 참 별일이 없이 오늘 하루가 지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근데 이렇게 별일 없는 게 별일로 느껴졌다. 약간 멍청해진 기분마저 들었다. 나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한 하루를 보내도 될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좋았다. 편했다. 하지만 또 불안했다. 이렇게 도태되는 게 아닐까. 나는 어쩌면 사건 중독자, 혹은 도파민 중독자가 되어버린 걸 지도 모른다.


오늘이 가기 전 타인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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